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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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금기로 박제화된 천재 원효 스님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원효 스님 영정. 현대불교 자료사진.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여법(如法)하기나 한 것입니까. 혼자 머릿속에서 상상한 이야기를 불법(佛法)의 이름을 참칭해서 팔고 있지나 않습니까.

오늘은 그 판단에 도움이 되시라고, 수수께끼 두 개를 내드릴까 합니다. 하나는 내가 절창(絶唱)이라고 생각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이고, 또 하나는 원효 스님의 <진역 화엄경소(晉譯華嚴經疏)>의 서문입니다.


대낮의 잠꼬대

위산( 山)의 영우( 山靈祐 771~853)는 본래 인적이 끊긴 험준한 산 속에서 짐승들과 더불어 도토리, 밤을 주으며 살았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집을 얽고 절을 지어주었지요. 황제는 이곳에 동경사(同慶寺)란 이름을 내렸고, 정승 배휴(裵休)까지 찾아와서 현묘한 진리를 물었습니다. 그 아래 천오백의 선객(禪客)들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합니다. 그 가운데 앙산(仰山慧寂, 807~883)과 향엄(香嚴 ?~898)이라는 기라성이 끼어 있었고, 이윽고 선의 5대 문파 가운데 하나인 위앙종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들 사이에 오간, 저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스승 위산이 설핏 낮잠이 들었습니다. 앙산이 모르고 방문을 열었고, 문고리소리에 잠이 깬 위산은, 내색을 않고, 벽쪽으로 돌아누웠습니다. 앙산이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어째서 낯선 사람 대하듯 격식을 차리십니까.” 스승은 잠이 그제서야 깬 척 몸을 뒤척였습니다.
앙산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가려 하자 위산이 불러 세웠습니다. “나 이제, 막 꿈을 꾸고 있던 참이네. 무슨 꿈인지 들어볼 텐가.” 앙산이 자세히 듣겠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위산이 입을 열다말고, 이렇게 주문했습니다. “자네가 어디 한번 맞추어 보게나.” 앙산은 말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세숫대야에 수건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세수를 마친 위산이 자리를 고쳐 앉을 판인데, 또 다른 제자 향엄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위산이 말했습니다. “우린 지금 기적을 연출하고 있는 중이었지. 이만저만한 기적이 아니야.” “제가 비록 저 아래에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 정도는 다 알고 있습니다.” 위산이 “그래? 어디 한번 들어보세” 하고 자리를 고쳐 잡았고, 향엄은 나가서 차를 한잔 받쳐들고 왔습니다. 위산은 파안(破顔)했습니다. “너희들의 지혜와 신통은 사리불(舍利弗·Sariputra)과 목련(目連·Maudgalyayana)을 넘어섰다.”

이것이 세 사람이 벌인 기이한 연극의 전말입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두 번째 수수께끼를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사설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원효, 신화이면서 금기인 인물

원효는 한국불교사의 다시없는 거인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원효만큼 신화가 된 인물이 드물고, 또 한편 원효만큼 금기인 인물이 다시 없습니다.

누가 그를 안다 하겠습니까. 산중에서 좌선에 들었다가도 어느날 술집에서 건달들과 어울리고, 거룩하게 경전을 해설하다가도 다음날은 아이들과 표주박을 두드리며 춤을 추고 노는 이 불기(不羈)의 인물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종잡을 수 없는 고삐풀린 말’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 당대에 전해진 팔만 사천의 법문, 그 어렵고 복잡하고 난해한 불교의 교설을 한 손에 장악한 사람이 다시 누가 있었습니까. 이것은 불교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불교사의 장관입니다. 팔만의 법문이 서로 엇갈려보이지만 기실, 같은 진실의 서로 다른 얼굴이라는 종요(宗要)와 화쟁을 자신있게 설파한 사람이 조선불교사상 다시 누가 있었습니까. 그를 무슨 배짱으로 무시할 것입니까.

행적을 보면 파천황의 건달같은데, 업적을 보면 크고 위대한 사람, 이 두 딜레마 앞에서 역사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한편 신화 속에 모셔놓고, 한편 금기 속에 가두어두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효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높고 심오해서, 너무 복잡하고 치밀해서, 사람들은 그를 ‘신화’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를 말하면 언필칭 떠올리는 <대승기신론소>나 <금강삼매경론>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개의 해설서들은 여전 난해한 한문투 그대로라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 바람에, 원효는 위대하다고는 하나, 무엇이 위대한지는 모르는 기이한 사태가 여전 반복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을 따라하고 행적을 본받겠습니까. 스님네들 중에 그의 궤적을 내놓고 따라할 파천황의 용기 혹은 만용(?)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혹 따라한다고 해도 불교계가, 아니 그래도 은처(隱妻)로 은밀히 몸살을 앓고 있는 판에, 원효처럼 장가를 들고 애를 낳겠다고 나서면, 누가 그를 존경하겠습니까. 존경은커녕 용납되기나 할 것입니까. 하여 원효의 삶은 따라해서는 안되는 ‘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정말 기이한 사태 아닙니까. 위대하다지만 그를 이해할 수 없고, 존경하지만 본받아서는 안되는(?) 이 모순을 여러분들은 이상하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이 엇갈리는 동거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신화와 금기를 깨고, 원효를 보는 법을 배웁시다. 오랜 박제를 깨고 원효를 우리 삶 속으로 불러오는 노력 없이는 원효조차, 지옥업이 될지 모릅니다. <금강경>은 그 우상화의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 자꾸만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선도 또한 이 정신을 이어받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대역죄를 선양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화와 금기는,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불교라고 해도, 우리를 부자유와 비참에 빠뜨리고 만다는 것을 불교만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원효를 그만 해방시켜줍시다. 원효 자신이 그렇게 우상화되고 소외되어 오느라 얼마나 분하고 답답했겠습니까.



불기(不羈)의 삶, 그리고 화엄의 교학 사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첫걸음은 원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삶에 더 깊이, 두려움 없이, 그리고 환상 없이 다가서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고, 그가 보여주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불교는 곧 그의 삶입니다. 그의 불기(不羈)의 삶은 그의 오랜 불교적 모색의 귀결임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효의 불교는 경전에 대한 주석의 형태로 되어 있어, 독특한 개념과 어법, 그리고 논리와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근본 취지를 읽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활간(活看)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의 삶과 교학 사이의 연관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의 불교가 곧 그의 삶임을 수수께끼처럼 알려주는 예를 하나 들어드릴까 합니다. 바로 그가 쓴 <진역 화엄경소(晉譯華嚴經疏)>의 서문입니다.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
2005-04-28 오전 10:02:00
 
한마디
그런데, <진역 화엄경소(晉譯華嚴經疏)>의 서문은 어디에 있나요...
(2005-04-28 오후 12: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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