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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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 걸린 맹수처럼 화두 들라”
범어사 설선대법회 지상중계8-4월 23일, 원융스님(해인총림수좌)


무문관은 힘으로 여는 것도 아니고 쇠망치로 때려 부순다고 열리
원융 스님
는 것도 아닙니다. 또 범부고 성인이고 통과하지 못합니다. 부처님 법을 깨달은 묘각지(妙覺地) 보살이라야 통과합니다.

오늘 주제인 ‘화두는 조사공안이다’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부의 명제인 화두를 왜 ‘공안(公案)’이라고 하는가? 공안이라는 말은 공공법규를 말합니다. 법률ㆍ법규가 있어야만 나라를 다스리듯 조사문중에서 공부인을 바로 잡아 이끌고 밝고 어둠을 판별하기 위해선 최후의 관문에 도달한 불조(佛祖)의 공안으로써 바른 법령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점검할 때도 공안으로 하고, 구경도리(究竟道理)도 화두를 깨쳐야 요달(了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조(六祖) 문하생입니다. 화두가 없으면 화두를 받아서 생명으로 삼고, 자기 부처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화두만 요달하면 성불합니다.

성불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 자성을 요달하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알고 화두만 깨치면 성불합니다. 화두 없이 참선하면 전쟁에 나간 병사가 소총을 안 가지고 나간 것과 같습니다.

1700 공안이 있지만 오로지 하나면 됩니다. 자기가 믿는 큰스님에게 화두를 받아서 본참(本參)공안으로 삼고 매달려 죽기 살기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한 개 공안만 결택(決擇)해 그 공안만 해결하면 나머지 공안도 해결됩니다. 하나를 모르면 다 모르고 하나를 통하면 다 통합니다.

맹수가 포수들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면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칩니다. 맹수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날카로운 이빨로 올가미를 물어뜯어서라도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포기하면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옛 스님들도 생사의 올가미에서 뛰쳐나와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화두라고 했습니다.

옛날 제가 살던 동네에서 포수들이 멧돼지 잡는 것을 봤습니다. 포수들이 쏜 총에 맞으면 멧돼지의 창자가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흘러내린 창자가 나무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면 멧돼지는 나무를 한바퀴 돌아서 창자를 끊은 다음 도망갑니다. 얼마 후 죽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참선도 바로 그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면 성불을 못하는가요? 〈증도가〉에서 법의 재물을 축내고 공덕을 없애는 작용을 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심(心)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합니다. 이 아뢰야식은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도인경지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8식 아뢰야식은 제8 마괴라고도 합니다.

심의식 중 의(意)는 제 7식을 말합니다. 제 7식은 말라식(末那識)이라고 하는데 현대 심리학 용어로 잠재의식을 일컫습니다. 이에 비해 심(心)은 무의식이죠. 식(識)은 제6식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말합니다. 이 심의식 경계를 초탈해야만 생사해탈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역점을 둬야 할 것은 폼 잡고, 호흡 고르고, 앞 뒤 둘러보고 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덫에 덜커덕 걸려 아차 하는 순간 포수에게 잡혀 죽을 지경인데 앞 뒤 둘러볼 겨를이 있습니까? 체면불구하고 올가미를 끊고 도망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화두만 깨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거세게 달라붙어 해결해야 합니다.

화두를 열심히 오래 들면 깨친다고 했는데 당신은 3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란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온 것도 염라대왕 앞에 밥값 계산하러 온 것입니다.

총림이란 쉽게 말해서 대중처입니다. 평생을 총림에서 이가 누렇고 머리가 허옇도록 살면서 이 도리를 모르면 ‘총림의 골동품’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골동품은 가치는 있지만 용처가 없습니다. ‘밥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못해 마치면 바로 밥중입니다. 저도 내일 모레가 칠십인데 밥중이라는 소리를 안 들을 수 없을것 같아요.

하지만 공부에도 시절인연이 있어요. 대혜 스님은 불성이 뜻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때가 오면 그 뜻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다만 빨리빨리 해서 마쳐야지, 가만히 기다릴 수 없습니다.

원오극근(圓悟克勤) 선사가 15년을 시자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원오극근 선사가 깨친 것을 보고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가 “이 시자, 이제부터 참선할 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참선은 폼 잡고 좌복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성을 확철히 깨친 것을 말합니다.

더러는 참선 오래하고 거세게 달라붙는다고해서 구경까지 요달하는가 라고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거든요. 〈선요〉를 말씀하신 중국의 고봉(高峰) 스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고봉 스님은 열다섯 살에 스님이 됐습니다. 그 때 머리를 깎고 보니 머리카락이 떨어진 자리에 하얀 좁쌀 같은 것이 떨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사리였습니다. 그런 선근 공덕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스님은 20살까지 경도 보고 율도 익힌 다음 21세 때 단교묘륜(斷敎妙倫) 선사에게서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화두를 받았고, 설암조흠(雪巖祖欽) 선사에게서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는가?’화두를 받았습니다.

고봉 스님이 무자 화두를 받아서 정진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졸음이 엄습해 주체를 못했습니다. 앉아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스님이 3년을 서서 정진했습니다. 3년 가까이 되던 날 화장실에 들렀다 대중처소로 건너가던 중 대중이 안행(雁行)을 하면서 어디로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대중을 따라 갔더니 법연ㆍ달마ㆍ지공 선사 세분이 모셔진 삼탑전에서 독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을 읽다 머리를 드니 오조법연 선사 영에 사구게(四句偈)가 써 있는 것이었습니다.

‘100년, 3만6000일을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 놈이다’라는 구절을 보는 순간,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화두를 깨쳤습니다. 일 주일 전부터 꿈속에서 무자 화두를 공부해왔는데 무자 화두가 떠올라 화두삼매에 든 것이 아니고 ‘만법귀일’ 화두가 작용해 그 게송을 보고 깨쳐버린 겁니다. 그때 그 경계가 어떤 경계인지 모르고 점검도 받지 않고 구경을 요달한 지 알았습니다.

몇 해 뒤 설암(雪岩)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할 때였습니다. 설암 스님이 고봉 스님의 경계를 확인하려고 “평상시나 바쁠 때나 화두가 주인이 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고봉스님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걸어 다닐 때나 머무를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 할 때나 말을 들을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히 있을 때나 항상 삼매를 유지하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계입니다.

또 ‘꿈을 꿨을 때도 화두가 주인이 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역시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이 “잠이 들었을 때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꿈도 없고 아무 생각이 없는가. 그때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자 고봉 스님은 설암 스님으로부터 “오늘부터는 부처를 배우고 법을 배울 것도 없고 고금(古今)을 궁구(窮究)할 필요도 없으니,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잠이 깨면 곧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은 필경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것인가?’하라”는 지시를 받고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내 일생을 바보처럼 지낼지언정 이 한 일 결단코 밝혀내고 말리라”면서 5년을 정진하던 끝에 한 암자에서 밤중에 잠이 깨 이 일을 바로 의심하던 차에 같이 자던 도반이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의단(疑團)을 타파했습니다.

납자의 구경처가 안심입명(安心立命)입니다. 동정일여 몽정일여 오매일여 이 공부의 삼분단을 투과하면 바른 깨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올가미에 걸린 맹수처럼 거세게 달려들어 올가미를 날카로운 이빨로 끊고 도망쳐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습득(拾得)과 한산(寒山)이라는 문수보현의 화신이 있었습니다. 한산은 국청사라는 절에 드나들며 스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얻어먹고 그때마다 시 한 수를 지어 주는 것으로 밥값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은 시가 2백수가 넘어서 묶은 것이 〈한산시집〉입니다.

한산자가 말씀한 ‘참선백수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언시로 참선의 요체를 백가지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 시에 나온 마지막 두 구절입니다.

“참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선은 참구해도 다함이 없다.”


스님께 묻습니다

사회 : 화랑 스님(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질의 법사 : 흥수 스님
·1978년 성라암에서 법성 스님 은사로 출가
·84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85년 봉녕사 승가대학 졸업 후 제방선원에서 정진 중
·현재 조계종 기본선원 비구니 선감

재가 질의자 : 김윤환 거사
·2005 부산외국어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
·현재 (주)영광도서 대표이사, 이웃사랑을 파는 〈나눔의 가게〉 대표, 부산불교실업인회 회장


화두 하나 깨치면 모든 공안 깨치는 것

흥수 스님 : 화두를 참구할 때 덫에 걸린 맹수가 올가미를 끊고 탈출하듯이 맹렬히 화두를 들어서 금생에서 타파하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전 선지식들은 납자들을 제접할 때 그 근기를 잘 살펴서 화두를 주셨는데 오늘날은 천편일률적으로 화두를 줘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고, 또 천년 전 화두로 과연 조사관을 투과해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화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기지 않아 몇 년 정진하다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두가 조사공안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 선지식들이 납자들을 제접할 때 이 시대의 화두로 제시하면 좀 더 확고한 믿음으로써 돈발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범어사 보제루 앞에 모인 4천여 사부대중
원융 스님 : 어떻게 해야 의정을 발휘해 간절하게 화두를 참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당사자의 신심여하와 원력여하에 달려있다고 봐야 합니다. 화두를 어떤 자세로 참구해야 할 것인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긴가민가해 드는 둥 마는 둥 해서는 곤란합니다.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한순간도 끊어짐 없이 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억지로 쥐어짜서 의심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스스로 들리는 경지가 돼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지요.

화두가 아니면 생사해탈 도리를 성취할 수 없다, 나는 포수한테 잡혀 죽는다, 올가미를 끊고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무자 화두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두 번째로 ‘간시궐(乾屎獗)’ 화두가 있습니다. 무자 화두가 종문의 제일 공안입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이게 화두의 내용인데 〈서장〉에서는 다만 화두를 보라고 했습니다. 무자 화두를 타파하지 않고는 생사해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신념과 확신으로 꾸준히 열심히 참구해야 합니다.

옛날 스님들은 근기에 따라 화두를 줬습니다. 우리 종문에 1700 공안이 있다고 소문났지만 실제 종문의 중요한 공안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조주 무자든지 간시궐이라든지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든지 종문의 저명한 공안 중 하나를 결택해 본참공안으로 삼고 참구하면 됩니다. 〈서장〉에도 공안 중에서 하나만 깨치면 그것이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했습니다. 대표적 화두 하나만 깨치면 모든 화두를 깨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화두도 못 깨치면 다른 화두도 못 깨치는 것입니다. 옛날 조사스님처럼 학자 사이에 법을 거량하는 기연, 이것을 종문에서는 인연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화두를 줄 수 있고 화두를 생산할 수 있고 현대에서도 화두를 생산할 수 있는가. 옛날 조사스님들처럼 화두를 말씀해 그 화두를 믿고 우리의 공안으로 결택해 참구할 수 있는가 라는 기준의 관건은 그 조사스님이 화두를 타파했는가 입니다.

고봉 스님이나 대혜 스님 정도 법을 확철히 요달한 도인이라만 공안을 말할 수 있고 줄 수 있고 새로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흥수 스님 : 간화선을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원융 스님 : 간화선을 최상승 도리 또는 조사선 도리라고 하는데 우리 문중에서 자화자찬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육조단경〉에 연유합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최상승법에 의지해 수행하면 결단코 성불한다고 돼 있습니다. 육조 스님이 설하신 법을 최상승법이라고 했습니다. 육조 스님 문하생으로서 육조 스님 문하에서 전승되는 화두참선을 최상승선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그러면 육조 스님 이전에도 화두참선이 있었습니까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 임제 문중에서 간화선을 주된 참선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형식상 옛날과 다르지 않습니까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화두 참선법 양상과 방식은 다를지언정 옛날 조사스님이 참구해서 깨친 바탕을 그대로 전승하는 법입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겉으로 흐르는 것만 보지 말고 속에 흐르는 지하수맥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지성이라고 일컫는 영국의 시인 겸 평론가 T.S 엘리어트는 ‘전통이라는 것은 밖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도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간화선 참선법은 형식과 내용은 다를지언정 깨침의 구경법을 말하는데 일치하고, 조사선 도리 전통 이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김윤환 :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혜종고 스님이 〈서장〉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간화선이 이렇게 성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먼저 책을 읽어서 믿음을 깊이하고 수행의 과정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춘 뒤에 수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융 스님 : 단적으로 말해서 공부방법을 거꾸로 한 것입니다. 〈서장〉의 요지가 척사해현정견(斥邪解現正見)입니다. 이 말은 삿된 법을 꺾어서 물리치고 정견을 바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른 법이란 우리의 자성을 확철히 요달한 법입니다. 바른 법을 요달하려면 조사공안인 화두를 확철히 깨쳐야 합니다.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삿된 법을 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서장〉에서 전편을 통해 대혜 스님이 삿된 법이라고 질타하고 배척한 것이 조동 묵조선입니다. 조동 묵조선은 이론은 그럴듯하고 한 소식 하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경쾌한 것 같지만 거기에 주착(主着)합니다. 묵조선 하는 사람들은 그냥 망상을 일으키지 말고 쉬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종문에서 중요한 것은 깨침입니다. 깨침으로써 안심입명처를 찾고 생사해탈법을 성취하는 것인데 묵조선에서는 깨치려고 하지 않고 두번째 목적으로 칩니다. 아주 성성적적하면 그 자리가 바로 법을 성취한 자리긴 하지만 그야말로 성성적적한 자리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망상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쉬는 식으로 주창합니다. 깨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만 멈춰서 주착하는 그것이 사람 버리고 법 버리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대혜 스님이 삿된 법으로 친 것입니다. 무슨 법 무슨 법 따지지 말고 화두를 타파해야 하는데 책을 읽고 이론을 습득해 마음자리를 안정시킨 다음 참선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사실 참선하는데 지식이나 문자는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시골에서 가난해 학교도 못 다니고 했던 입장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머리 좋은 것이 도움 될지는 몰라도 옛날 남전 스님도 “천하에 미련한 놈 하나 찾아보려고 해도 못 찾겠다. 이 문중에서는 미련한 놈이 제일인데 영리한 놈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일류 대학 나온 스님들에게 화두를 시켜 놓으면 잘 못합니다.

문자 이론에 휘둘려 책을 안 읽으면 직성이 안 풀리고 안 되는 모양입니다.

참선법은 세계 인류 정신문화사상 하나의 금자탑이라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간결하고 짤막한 화두로 죽기 살기로 매달려 이것만 해결하면 생사해탈법을 성취하면 되는데 이런 좋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간화선을 목숨 걸고 해 보세요. 좋은 도리가 나옵니다.

김윤환 : ‘화두는 조사공안이다’라는 주제가 오늘 법문입니다. 간화선이란 중국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 스님에 의해 완성된 선의 수행방법론입니다. 그렇다면 간화선 참구법이 유행하기 이전의 당나라 때 조사들이 행했던 참선수행방법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울러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원융 스님 : 화두가 생기기 전 참선법은 큰스님들마다 한결같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달마 스님은 벽관(壁觀)으로 참선하도록 가르쳤고, 삼조 승찬(僧璨) 대사는 본분도리(本分道理)에 입각해 참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사조 도신(道信) 대사의 경우 여래선도리(如來禪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선도리의 요체는 일행삼매입니다. 사조 도신 대사부터 일행삼매가 나옵니다.

육조 스님 문하로 마조 백장 황벽 임제 스님이 연결되는데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여래청정선을 말합니다. 여래청정선이 종문에 화두가 생기기전 참선의 내용이고 이념입니다. 황벽 마조 임제 스님의 경우, 내용에 따라서는 조금 달리 이야기하지만 여래청정선이 종문의 정통 참선법이었습니다.

후대에 여래선은 얕고 조사선은 깊은 도리라 오해해서 말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후대에서 잘못 이해해 와전된 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어쨌든 종문의 바른 참선법은 여래청정선이고, 여래선이 곧 조사선이며, 조사선이 여래선 도리입니다.

정리=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글 남동우ㆍ사진 박재완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5-05-02 오후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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