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27. 조선시대 ②
불교에 대한 규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사찰의 새로운 건립을 금지하고 전국 사사(寺社)를 36사(寺)로 통합하도록 했다. 자연히 사원을 중심으로 했던 고려시대의 융성한 다풍은 선비들 사이에서 꽃피우게 된다. 가정의례에도 차를 쓰고 묘제(墓祭)나 시제(時祭)에도 차례를 행하게 된다. 일본과의 교역에도 다기나 차가 많이 소요되어 각 지방마다 자기가 생산된다. 자기의 질은 떨어졌지만 수적으로는 팽창한다. 명나라와도 차 교역은 계속된다.
나라가 안정되어 정비되니 자연 지방의 산물(産物)게 관한 특징, 유통 및 농작법이나 기타 백성들에게 필요한 저서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서적들이 글 모르는 백성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고, 국가적으로도 정책적 배려가 없어 농업이나 어업은 물론 요업(窯業)같은 특수산업은 기술적 장려나 전승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도 변동기를 치르고서 다풍이 일변하여 소강상태를 이루었고, 일본은 계속해서 무사 중심의 다도가 확대되어 갔다.
① 서거정은 조선 초의 학자로 호는 사가정(四佳亭)이었다. 중국에 다녀와서 차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사잠상인혜작설차’를 비롯한 다시 수편이 전한다.
② 예조(禮曹)에서 묘제에도 술을 쓰지 말고 차를 쓰도록 했다.
③ 사헌부에서 시작된 다시(茶時)가 다른 부서에 확대되었다.
④ 원도진(源道鎭)이 자완 1000여개와 다른 예물을 보냈고, 11월에는 등원만정이 자완 1000여개를 보내왔다.
⑤ 우대언, 허성을 보내어 범유에게 작설차 등을 내렸다.
⑥ 묘제에까지 차를 올린다는 것은 차가 생활 속에 뿌리내려 조상들도 생시에 차를 많이 마셨다는 증거다.
⑦ 창성이 채문자발(彩文磁鉢) 10벌과 자완 20벌을 요구하니 그대로 내리고 방동아(房童兒) 등에게도 예물을 주었다.
⑧ 심주(1427~1509): 명대 화가로 오문사대가(吳門四大家)의 한 사람. 호는 석전(石田). 차에 관해 <서오다별론후>라는 글과 다화(茶畵)를 남겼고 다른 글도 많이 썼다. 고저차(顧渚茶)를 좋아했다.
⑨ 왕비옹: 명대인으로 차를 즐겨 <육다기사(六茶紀事)>를 지었다. 이는 그가 곽산령으로 있을 때 친히 찻일을 맡아 공다(貢茶)까지 관리하며 지은 작품이다.
⑩ 섭자기: 명대 산문가로 그가 옥중에서 지은 <초목자(草木子)> 권3에 ‘어차(御茶)’에 관한 기록이 있어 다사(茶史)상 귀중한 자료가 된다.
⑪ 복강현 팔자(八姉) 주서선사가 차씨를 심고 부초(釜炒)법을 받아들여 후에 팔녀차(八女茶)로 이름을 얻었다.
<한국>
조선시대
1420 서거정의 출생 ①
1421 묘제(墓祭)에 차를 씀 ②
1423 사사(寺社) 창설 엄금
모든 관청에서 다시(茶時)를 행함 ③
1424 사사를 선교양종으로 36사로 통합
강희맹의 출생
1425 경상도 지리지 간행(하연)
1426 일본 사신시 자완 천개를 올리다 ④
대마주에 다식을 보내다
1427 범유에게 작설차를 내림 ⑤
1429 삼국시조묘(三國始祖廟)에 다례를 올림 ⑥
창성에게 발(鉢)과 완(椀)을 주다 ⑦
명나라 사신 요구 품목에 다기와 차가 있었다
<농사직설(農事直說)>
<중국>
명대
1425 창고에 쌓인 차로 관리의 봉급 지금
1427 심주(沈周)의 출생 ⑧
@ 왕비옹의 활동 ⑨
@ 섭자기(葉子奇)가 활동 ⑩
<일본>
실정(室町)
1424 주서(周瑞) 선사가 차를 심고 부초차를 만들다 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