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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m가 넘는 큰 규모와 특이한 형상이, 지방화 돼 다양하게 나타났던 고려시대 석불(또는 마애불)의 특징과 부합하는데다 조성과 관련된 전설의 배경이 11세기여서 고려시대조성설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4월 15·16일 통도사에서 열린 불교미술사학회(회장 범하) 춘계학술대회에서 이경화 조선대 강사가 조선초조성설을 제기하면서 용미리석불의 조성연대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경화씨는 조선초조성설의 근거를 용미리석불 측면 바위와 불신 하단에 있는 명문(銘文), 원정모를 닮은 보개(寶蓋) 등에서 찾고 있다.
조성연대와 기원문, 시주 및 화주 이름이 적혀 있는 명문에 따르면 용미리석불은 세조의 왕생정토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며, 그 연대는 성화(成化·明현종) 7년(1471년·성종2년)이다. 양녕대군의 아들 함양군(咸陽君, 1416~1474)과 한명회 셋째 부인으로 추정되는 정경부인 이씨 등이 시주로, 왕실과 밀착된 승려 혜심(惠心)이 화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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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씨는 그 명문을 다시 연구하고, 근거를 확보해 1471년 조성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박씨의 1465년과 6년의 차이가 생긴 까닭은 박씨가 연대부분을 ‘성화 一년’으로 읽은 데 반해 이씨는 ‘성화 七년’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명문이 용미리석불을 중수하고 새겨진 것이라거나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과 관련 이씨는 용미리석불이 세워진 파주가 세조의 비(妃)인 정희왕후의 고향이며, 예종·성종의 비로서 요절했던 한명회의 두 딸의 무덤(공릉·순릉)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시주로 참여한 이들은 세조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예종·성종 비의 능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 대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또 당시 권세와 재력을 겸비한 이들이 기존의 석불을 중수하기보다는 새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명문이 용미리석불 조상과 함께 새겨진 것이라고 보는 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는 원정모(圓頂帽) 형태의 보개다. 원정모는 원나라 귀족들이 쓰던 모자로, 고려말·조선초에만 관리와 승려가 많이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미리석불의 원형 보개가 원정모가 맞다면 11세기에 조상됐을 가능성은 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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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 씨의 조선초조성설에 대해 학계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이씨의 연구에 대해 “원형 보개를 원정모라 단정 짓기에는 근거가 부족하고, 얼굴이나 신체에 관한 도상연구 보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명문에 열거된 이들의 면면을 볼 때 중수기에 이름을 적어 넣었을 가능성은 적다”며 조선초조성설을 지지했다.
반면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용미리석불이 조선시대 조성됐다고 볼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불상 전면에 명문을 새기는 법은 없는데, 용미리석불의 명문은 전면에 있어 조상당시 새겨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명문의 신뢰성에 의구심을 표했다. 또 “용미리석불은 엄청난 공력을 들여야 조성할 수 있는 대불이다”며 “만약 조선시대 세워졌다면 그에 관한 이야기가 조선실록에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며 조선초조성설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