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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용수보살의 <보리심론(菩提心論)>'을 주제로 4월 16일부터 17일까지 총 6시간에 걸쳐 일본 카나자와 현립음악당에서 강론했다.
달라이 라마는 설법에 앞서 “소승, 대승, 밀승을 떠나 수행에 있어 기본이 되는 용수 보살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이라며 “내가 불교에 통달하거나 깨달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강론이 불교를 보다 심도 있게 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다음은 이날 진행된 1부 강의 내용.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중 용수 보살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이들이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원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행복과 불행은 크게 물질적인 것과 마음으로 인해 발생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마음으로 인해 생긴 행복과 불행의 정도가 훨씬 더 크다. 물질적, 육체적인 행복과 불행은 마음을 통해서 완화하거나 없앨 수 있지만 마음에서 오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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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한 미국인 친구는 많은 재물을 거느린 부자이지만 마음의 불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외부적인 무엇, 혹은 물질로 인해 마음의 불행을 없앨 수 있다면 세상에는 마음의 고통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대, 욕망, 의심, 질투, 경쟁심 등 마음 속의 다양한 것들이 고통이나 괴로움을 낳는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많이 가진 부자들이 이런 분심(忿心)이 많아 가난한 사람보다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불행을 느낀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지만 인간에게 직접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종교는 드물다. 인류가 의지해 온 주요 종교들이 인간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 중에서도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와 인정하지 않는 종교로 나눠진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 가운데 고정불멸한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유아, 有我)와 인정하지 않는 종교(무아, 無我)가 있다. 불교는 무아를 인정하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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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에서 산스크리트어 경전의 번역 중에 율장부분에서는 용수 보살의 수행과 논학을 겸한 논장 200부 정도가 있다. 따라서 티베트에서는 논장을 중심으로 경전공부 및 수행이 이뤄진다. 이와 같은 논장들은 나란다 대학 출신의 논사들에 이뤄진 나란다 대학의 전통과 방식을 계보로 잇고 있다. 즉 나란다의 수행방식을 그대로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를 대승과 소승을 구분 지을 때 서로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소승의 가르침 위에 대승이 있기 때문에, 소승 없이 대승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 소승, 밀승을 나눠 모두를 별개로 나누는 것은 불교를 모르는 행위이다.
최고 단계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랫 단계의 수행법들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맨 아래 단계 수행법이 기본이 된다. 다시 말해 대승, 밀승의 수행법과 맨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소승의 수행법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밀승의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아랫단계의 수행을 알아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소승의 수행법을 익혀야 한다.
오늘 논의할 주제는 용수 보살의 지혜다. 내가 앉은 자리 뒤 탱화 오른편에 계신 분이 용수 보살이고, 왼편에 계신 분은 무착 보살이다. 용수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400년 후, 무착 보살은 부처님 열반 후 900년이 지난 뒤 세상에 나투셨다. 이 두분 보살이 중관계와 유식의 대표적인 논사라고 할 수 있다.
용수 보살과 무착 보살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산스크리트어를 기반에 둔 많은 경전들이 중관계와 유식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무착 보살은 유식에 대해, 용수보살은 중관계에 대해 설하셨다. 이들 또한 부처님 생전부터 중관계와 유식이 중요하게 다뤄졌기 때문에 부처님 열반 후에도 이를 홍포했다.
두 불보살은 또한 나란다 대학의 중요한 학자였다. 특히 용수 보살 당시에는 나란다 대학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다. 이 두 보살을 따르는 산트라시타와 까말라시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 나란다 출신으로, 티베트에서 불교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배우고 암송한 모든 경전들이 나란다 출신의 논사들이 정리한 경전이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고 수행하는 기초가 나란다 논사들의 경전이기 때문에 법회 때 이들 경전을 설하면 편안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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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는 크게 닝마파, 사키야파, 겔룩파, 카규파로 크게 4가지 종파로 나눠진다. 티베트 불교 수행자 중 오로지 자기가 속한 종파의 수행법을 따르는 사람과, 또 종파 구별 없이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여 정진하는 사람이 있다. 5대, 13대 달라이라마께서는 이들 4개 종파의 모든 수행법을 받아들여 수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종파의 구분 없이 모든 수행법을 실제적으로 공부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종파의 수행법을 경험하는 것이 나 스스로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법을 설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된다.
<보리심론>의 서두를 보면 귀의문이 나와 있다. 이는 경전을 처음 옮긴이들이 자신이 모시고 수행하는 본존불에 대한 귀의와 번역에 있어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또 불ㆍ보살과 문수보살에게 귀의한다는 표현을 통해 귀의하는 대상에 따라 이 경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번역자에 따라 경, 율, 논 삼장의 어떤 부분에 해당되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정에 대한 것은 경을, 지계와 계율에 대한 내용은 율을, 지혜, 반야에 대한 부분은 논을 담고 있다. ‘문수보살에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면 지혜를 구하는 논장에 포함되는 경전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교재로 쓰고 있는 <보리심론>에는 ‘금강살타에 귀의한다’고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경전과는 다르게 용수보살이 밀집 2장에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 설법의 원문을 다룬 내용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고집멸도 사성제를 통해 설법하실 때, 사성제의 본질, 작용, 결과의 세 가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고성제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고성제가 작용하는 결과로서 고성제는 알바도 말할 바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고성제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기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사성제의 바탕이자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고통을 관찰해 수행을 통해 번뇌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인 ‘멸제’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성제를 쉽게 이해하려면 모두에게 있는 자연적인 현상인 행복을 원하고 불행은 원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살피면 된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행복과 불행의 감정은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라는 의식으로 인해 무언가를 느끼고, 알게 되는데 내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가?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은 조건이나 원인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인가? 이들 모두 사성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원인을 없애면 결과물인 고통을 없앨 수 있게 된다. 또 어떠한 결과를 원하면 그것을 이끄는 원인을 가져야 한다.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은 번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번뇌부터 없애야 한다. 번뇌를 끊는 상태가 곧 ‘멸제’이며 이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 ‘도성제’다.
고통의 원인인 번뇌를 끊는 상태가 곧 행복이다. 세속의 행복들은 매우 유한적이기 때문에 영원한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실제적으로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 이를 없애는 상태가 ‘적멸’, ‘적장’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는 행복이다.
다시 말해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애는 대치법을 통해서 원인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킨 상태가 멸도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결과인 행복을 얻은 상태, 즉 4가지 원인과 결과에 대해 논한 것이 사성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한 원인과 결과다.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원인과 결과를 살피는 것이므로 사성제는 연기의 사상과도 맞물려 있다.
사성제를 통해 원인과 결과의 작용을 알게 되면 12연기 또한 설명할 수 있다. 연기를 배우면 여러분 행동양식에 있어 비폭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폭력은 인상이나 겉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아무리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속으로 기만하거나 비난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폭력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어떤 마음과 동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폭력적인지 비폭력적인지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무착 보살은 부동인, 무상인, 역인 등 세 가지 원인에 의해 결과물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부동인은 움직이지 않는 원인을, 무상인은 무한한 자성으로 발생하는 원인을, 역인은 결과물을 이끌어내기 위한 능력과 힘을 의미한다. 모든 결과는 상응하는 적절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통을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과를 낳는 원인을 갖게 되는 것은 결국 다가올 결과에 대해 몽매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즉 원인은 무명에 의해서 시작된다.
연기사상은 그러므로 왜 비폭력이 필요하며 중요한지 설명해 주고 있다. 연기 사상은 실제로 불교 뿐 아니라 세계 경제, 인류건강, 복지 등 사회의 모든 이슈가 상호관계에 있음을 설명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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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는 5온 18계 12처에 의지해서 생겨난다. 여기에 의지한 ‘나’를 주체와 객체로 나눌 수 있다. 외부적인 요인이 객체, 이를 인식하는 마음이 주체다. 유식학파에서는 주체와 객체를 끊는다고 하는데 물질적인 형상이 있건 없건 인식이 된 객체와 주체사이의 의식을 끊는 것이다. 이런 주체와 객체들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에 의해서 이런 모든 것의 외부 대상 주체와 객체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유식의 주장이다. 주체와 객체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을 다시 말하면 공이다. 유식파는 더 나아가 이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아이기 때문에 곧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나눠진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실제적인 의식을 거쳐 청정심, 여래심에 해당하는 미세한 마음을 가르킨다. 결국 미세한 마음(청정심)은 본래부터 물들지 않은 마음, 애초에 ‘남’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이를 밀승의 견해로 해석한다면 외부요인을 인식하는 마음도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 생각이기 때문에 이 자체를 공의 본성으로 볼 수 있다. 즉 조건과 원인에 의해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는 고요한 성질의 마음의 공의 자성이자 본성이다.
(17일 법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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