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25. 조선시대 ①
조선의 건국은 정치 경제 뿐 아니라 문화에까지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상대 교역국이 주로 명나라기 때문에 차도 고려의 연고차 형태에서 차츰 산차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나 다풍을 거의 이어받아 사헌부에서 다시(茶時)를 행하는 제도도 있었고, 다모(茶母)라는 직책이 생겼다. 한편 방만했던 사찰과 승려들에 대한 정비와 개혁이 서서히 이루어진다. 궁내의 제례는 물론 사가(私家)에서도 제사 때 차를 올렸고 왕의 묘당(廟堂)에는 술도 함께 쓰도록 했다. 12, 13세기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던 청자의 기법이 고려 말의 혼란기를 겪으며 퇴보하여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다기(茶器)들이 생산된다.
중국은 명(明)초여서 원의 제도를 그대로 두었고, 특기할 일은 태조가 용봉차 제조를 금지한 후 다엽(茶葉)을 산차로 만들게 한 것이다.
일본도 이때부터 거리에 찻집이 생길 정도로 저변이 확산되고 상류층에선 차의 유파(流波)가 생기기 시작한다.
① 태종 원년 2년 계묘일에 사신을 맞아 다례를 행했다.
② 정극인(1401~1481):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각(茶角), 다헌(茶軒)이라 했다. <불우헌집>에서 사헌부의 다시(茶時) 이야기를 썼고 상춘곡을 지었다.
③ 5월 20일 명나라 사신에게 석등잔과 작설차를 줬다.
④ 혜민국(惠民局)의 의녀(醫女) 중에 다모의 일을 보게 했다.
⑤ 낭비가 심하다는 이유로 제사에 차 대신 술을 쓰는 것을 금했다.
⑥ 12월 1일 이지(李漬)는 간원(諫院)의 탄핵을 당해서 그에 대한 판결을 다시(茶時)에서 결정했다.
⑦ 태조대왕과 왕후의 제사에만 술을 쓰고 나머지 제례에는 차만 쓰던 것을 모든 왕과 비의 제례에 술을 쓰도록 했다.
⑧ 중국 사신 해수가 암화분색(暗花紛色) 다종(茶鐘)과 다병을 바쳤다.
⑨ 조정의 중론에 의해 정ㆍ부사(正ㆍ副使)에게 차와 인삼만 내리게 했다.
⑩ 장흥고 직장 이사문이 다모와 간퐁하였는데 그 장모가 원해서 보방했다.
⑪ 명나라 사신에게 전다구(煎茶具)와 차, 다시(茶匙) 등을 하사했다.
⑫ 예겸(1415~1479): 명대 문인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예문희집(倪文僖集)>에 ‘다방(茶榜)’이라는 글에서 차에 대한 생각을 썼다.
⑬ 실전시대(室町時代): 동사(東寺)의 남문 앞에 한 잔에 한 돈 하는 다점(茶店)이 있었다고 했으니 서민들의 찻집으로 보인다.
⑭ 5월 14일 하인들이 복견궁(伏見宮)의 부엌에서 운각다회(雲脚茶會)를 베풀었다고 <간문어기(看聞御記)>에 전하고 그림도 있다.
<한국>
조선시대
1401 명나라 사신에게 다례(茶禮)를 행함 ①
정극인(丁克仁)의 출생 ②
1402 명나라 사신에게 작설차를 내림 ③
대신드이 민무의 집에서 다례를 지냄
내시와 다방 출신자에게 7, 8품 제수
1405 사헌부에서 다시(茶時)를 행함
1406 혜민국의 다모(茶母) ④
1407 제사에 술을 쓰지 말고 차를 쓰도록 함 ⑤
1409 최항의 출생
1411 다시(茶時)를 행함 ⑥
종묘제례법 개정
1416 궁중제상에 차만 쓰는 것은 옳지 않다 ⑦
각도(各道)의 공물상정(貢物詳定)
1417 명나라 사신이 다종(茶鐘)을 가져옴 ⑧
@ 분청다기(粉靑茶器)의 생산
사신의 정(正)ㆍ부사(副使)에게 차를 주다 ⑨
1418 다모(茶母) 간통사건 ⑩
1419 명나라 사신에게 차와 다구 하사 ⑪
사사(寺社) 노비 폐지
<중국>
명대
1407 안남정복 후 교지포정사(交趾布政司)를 둠
1409 다금(茶禁)을 신계(申戒) 함
1415 예겸(倪謙)의 출생 ⑫
<일본>
1401 족리의만이 명과 교역하다
1403 동사(東寺) 남문 밖에 서민 다점이 생기다 ⑬
1406 희야(嬉野)에 초차가 있었음
@ 동산류(東山流)의 다도가 생김
1417 운각다회(雲脚茶會)를 열다 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