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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襄陽)의 해변가 오봉산(五峰山) 아래 낙산사 도량에는 언제나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손길이 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관음의 진신이 상주하는 도량 낙산사, 이 절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을 관음보살 자비의 손길로 구하려는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다.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의상대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에 대해서는 다소 이설이 있기도 하지만, 그가 당나라 유학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한 670년 직후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사중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고 있는 671년(문무왕 11) 창건설은 역사적 사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낙산사는 무려 1300년 이상의역사를 간직해 오고 있다. 특히 창건 시기부터 존숭되어 온 관음신앙은 지금도 이 곳 낙산사를 대표하는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결과 낙산사는 한국의 대표적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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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의 연혁>
671년(신라 문무왕11) :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함.
786년(원성왕2) : 화재로 인하여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858년(헌안왕2) : 범일스님이 중창함. 이 때 세 칸의 불전과 정취보살상을 짓고 봉안함.
10세기 중엽 : 범일스님의 중창 이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들불이 일어나 이 곳까지 번져오므로써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탐. 그러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함.
1197년(고려 명종27) : 유자량(庾資諒)이 관음굴에서 기도하다가 파랑새〔靑鳥〕의 영험을 겸험함.
13세기 초 : 이규보(李奎報)가 관음보살상을 보수하고 복장 유물을 다시 봉안함.
1254년(고종41) : 몽고군의 침입으로 관음상과 정취보살상,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김. 양주성마저 함락되자 두 보주를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감창고(監倉庫)에 간직함.
1258년(고종45) : 감창고에 있던 두 보주를 어부(御府)로 옮겨 보관함.
1399년(조선 정종1) : 태조 이성계가 행차하여 능엄법회를 개최함.
1403년(태종3) : 태종이 선공소감(繕工少監) 김계란(金桂欄)을 보내어 재이(災異)를 없애기 위한 도량을 개최함.
1404년(태종4) : 왕실에서 내신을 보내어 기청법회(祈晴法會)를 개최함.
1466년(세조12) : 세조대왕이 행차함.
1467년(세조13) : 세종대왕이 행차하여 헌향하고 사찰 중건을 지시함.
1468년(세조14) : 학열(學悅)스님이 중창함.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칠층석탑, 홍예문, 원통보전 담장 등은 이 무렵 조성된 것임.
1471년(성종2) : 선학(仙學)스님이 중수함. 이때 용선전, 영산전, 어제루, 승당 등을 보수하고 단청도 새로 입혔다고 함.
1489년(성종20) : 산불로 인하여 관음전이 불에 탐.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으로 사찰 대부분의 당우가 불에 탐.
1619년(광해군11) : 관음굴을 중건함.
1631년(인조9) : 화재가 발행하여 사찰이 불에 탐. 종밀(宗密), 학조(學祖)스님 등 36인이 중창함.
1643년(인조21) : 도원(道源), 대주(大珠)스님 등 25인이 중수함.
1683년(숙종9) :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 공중에서 한 개의 명주(明珠)가 내려 왔다고 함. 석겸(釋謙)스님이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탑을 조성함.
1692년(숙종18) :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을 조성함.
1694년(숙종20) : 공중사리비(空中舍利碑)를 건립함.
1697년(숙종23) : 정수(精粹)스님이 인월암(印月庵)을 창건함.
1737년(영조13) : 석겸스님 등이 사적판(寺蹟板)을 새김.
1752년(영조28) : 덕린(德麟)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1777년(정조1) : 화재로 인하여 원통보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에 탐.
1797년(정조21) : 혜민(慧旻)스님이 홍련암을 중수함
1854년(철종5) : 경봉(鏡峰)·염진(念眞)·긍념(肯念)등의 스님이 화주가 되어 원통보전과 용선전을 중수함. 어실각(御室閣)을 중수함. 화봉(華峰)스님이「낙산사원통보전어실각수보기(洛山寺圓通寶殿御室閣修補記)」를 지음.
1866년(고종3) : 큰 비로 인하여 홍련암이 무너짐.
1869년(고종6) : 의연(義演)스님이 홍령암을 중건함.
1870년(고종7) : 최병복(崔秉復)이 「홍련암중건기」를 지음.
1888년(고종25) : 선학(仙鶴)스님이 빈일루(賓日樓)를 중건함.
1893년(고종30) : 선학, 인파(仁坡)등의 스님이 영산전을 중수함. 일봉(日峰)스님이 「오봉산낙산사영산전중수불사단호기」를 지음.
1895년(고종32) : 승당이 불에 타자 선학스님이 중건함.
1905년 : 경은(敬隱)스님이 선당, 후각(後閣)등의 일부 당우를 새로 지음.
1908년 : 관음굴이 무너짐.
1911년 :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관음굴을 중건함. 보룡스님이 「낙산사관음굴상량문」과 「낙산사관음굴중창기」를 지음.
1912년 : 일제의 30본말사법에 의해 건봉사의 말사가 됨.
해성(海星)스님이 빈일루를 중건함.
김동규(金東圭)가「낙산사빈일루중수기(洛山寺賓日樓重修記)」를 지음.
1913년 : 백월(白月)스님이 「영세불망기」를 지음.
1918년 : 주지 응호(應湖)스님이 법전과 요사를 수리함.
1924년 : 주지 규현(奎鉉)스님이 도량 전체를 수리함.
1925년 : 만옹(晩翁)스님이 의상대에 정자를 새로 지음.
만해(萬海)스님이 「의상대기(義湘臺記)」를 지음.
1928년 : 만해스님이 건봉사(乾鳳寺)의 본말사 사적을 편찬하면서 낙산사의 사적도 함께 정리함.
1930년 :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불에 탐.
1932년 : 주지 만옹스님이 중검함.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중건상량문」을 지음.
1937년 : 1936년의 폭풍우로 무너졌던 의상대 정자를 새로 지음.
1939년 : 박한영스님이 「낙산사의상대육각정중건기」를 지음.
1950년 : 한국전쟁 때 사찰 내 전체 당우가 불에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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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 이형근 장군이 원통보전과 종각등을 새로지으면서 중창함. 7층석탑도 이 때 중수하였슴.
1959년 : 원통보전 내부의 신중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함.
1963년 : 홍예문 위의 누각을 새로 지음.
1968년 : 「낙산사동종」이 보물 제479호, 「낙산사칠층석탑」이 보물 제499호로 각각 지정됨.
1971년 : 「낙산홍예문」·「낙산사담장」·「낙산사」등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34·35호로 각각 지정됨.
1972년 : 원철(圓徹)스님이 중창을 시작함.
1974년 : 「의상대」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됨.
1975년 : 의상대를 중건함. 홍련암을 중창하면서 내부에 탱화와 제석천룡탱화를 함께 조성함.
1976년 : 홍예문을 중건함.
1977년 : 원철주지스님이 해수관음전을 짓고 동양최대해수관세음보살을 봉안함.
1982년 : 「양양낙산사사리탑」이 강원도유형문화재 제 75호로 지정됨.
1983년 : 진철주지스님께서 고향실.무설전.무이당을 해체 복원 중창함.
1984년 : 진철주지스님게서 양양시내에 포교당 및 유치원을 개원함.
1984년 : 「낙산사홍련암」이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36호로 지정됨.
1988년 : 혜승주지스님이 범종각을 짓고 범종을 주조함.
1988년06월22일 : 전통사찰로 등록.
1991년 : 보산주지스님 일주문 건립.
1993년 : 오현, 지흥, 마근 스님의 원력으로 보타전, 보타루, 해우당을 건립하고 1500불 32응신 7관음상을 봉안함.
1995년 : 마근주지스님께서 의상대를 해체 복원함.
1996년 : 마근주지스님게서 심검당을 신축함.
1999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창고를 철거하고 근행당을 건립.
1999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홍련암을 해체 복원함.
2000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의상기념관 다래헌을 건립.
2001년 : 지홍주지스님께서 의상교육관을 건립하고 원통보전 기와 번와와 단청을 함.
2003년 03월 : 설웅주지스님께서 낙산유스호텔을 인수 증.개축함.
2003년 02월03월 :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 관세음보살좌상이 보물 제 1362호로 지정.
관련 링크 : 부다피아 낙산사 홈페이지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