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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과 고성 일대를 덮친 산불로 일거에 사라진 낙산사 건축물은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에 재건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이전, 특히 식민지시대 무렵 낙산사는 어떤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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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1916년 불교진흥회라는 단체에서 발간한 월보에 실려 있다. 제목은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의 범종(梵鐘)에 취(就)하야'이며 부제로 '양양군을 거(距)하기를(=떨어지기를) 1리 반(半)'을 달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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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낙산사의 범종(梵鐘)에 취(就)하야'
사(寺)는 양양군 사현면(沙峴面) 전진리(前津里)에 재(在)하니 영동팔경(嶺東八景)의 일(一)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자(者)이니 신라 문무왕 11년 신미(辛未)에 의상조사(義湘祖師)의 창건(창<井+刃>建)의 계(係)한 배라 운(云)하는데 사(寺)의 관세음보살은 영험이 현저하다 하야 유명하며 원통보전(圓通寶殿), 천주문(天主門)은 이조 중기의 건축이오 영산전(靈山殿), 용홍전(龍舡殿), 조계문(曹溪門), 응향문(凝香門), 설선당(說禪堂), 대성문(大聖門) 등은 개(皆) 이조 후기의 건축이오 정내(庭內. 사찰 뜰안) 칠중(七重) 석탑은 이조 세조 13년의 건립으로 종각의 거종(巨鐘) 1구는 이조 예종왕의 원년의 주조에 계(係)한 자(者)이니 기(其) 종명(鐘名)은 여좌(如左)하며(다음과 같으며) 사(寺)의 보물로 이조 성종왕(成宗王)의 교서(敎書) 2통이 금(今)에 전한다 하는데 낙산사사적(洛山寺事蹟)을 견(見)한즉 낙산은 서역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과 무이(無異)하니 피(彼) 서역 낙산(洛山)은 진신관음(眞身觀音) 상주(常住) 설법처(說法處)요 아(我) 낙산봉(洛山峯) 하(下) 암굴(岩堀) 중(中)은 진신관음(眞身觀音) 상주(常住) 설법처로 신라시대에 의상조사가 차처(此處)에 래(來)하야 굴중(堀中)에 입(入)하야 친히 관음께 견(見)하되 관음이 수정(水精)의 염주(念珠) 병(幷) 동해용왕(東海龍王)이 헌(獻)하는 바 보주(寶珠)로써 의상에게 수(授)하얐다 하며 보타락가산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에 관한 사(事)는 타일(他日) 고(稿)를 개(改)하야 술(述)코져 하며 종(終)에 임(臨)하야 여(余)의 연구에 자(資)키 위하야 낙산사 사적 병(幷) 종명탁본을 혜증(惠贈)한 전(前) 사지(寺持) 윤설호(尹雪昊)에게 사의(謝意)를 표(表)하노라.(7월23일 고<稿>)
관련 링크 : 부다피아 낙산사 홈페이지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