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일원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재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원통보전과 종각, 선실, 승당, 객실 등이 있다. 천왕문에 안치된 사천왕상은 조선 말기의 공장 김주성이 조성한 것이다. 문화재로는 동종(보물 제479호)과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원장(垣墻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사리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 홍련암(紅蓮庵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등이 있다.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 홍예문은 화강석 26개로 만든 반월형의 문인데, 당시 강원도에 있던 모두 26개 고을의 군수가 세조의 뜻에 따라 석재를 하나씩 가져와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최근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세웠는데,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로 한 송이 연꽃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했는데,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밖에도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하는 자리에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하나이다. [설화] 이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에 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과 천중(天衆) 등 8부신장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해 예배드렸더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주므로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이들을 가지고 와서 의상은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했다.
의상은 그 곳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고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 보지 못했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신라의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조신이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해로하기 50여 년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는 꿈을 꾸고 난 뒤 수행에 정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 1892-?)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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