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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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를 거쳐간 고승들
의상 대사

신라
신라시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 현대불교자료사진
문무왕 10년인 670년,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 대사가 신라로 돌아온 후 어느 해에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스님은 지심을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낙산사의 창건 설화가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고, ‘이 자리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고 했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의 승려 생활은 당나라 유학 시기를 기준으로 해 유학이전까지의 국내 수학시기와 유학 이후의 활동기로 각각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국재 수학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시기 원효 대사과 함께 수행했을 것이라는 점과 원효 대사와 함께 고구려의 보덕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 등은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신라고승인 낭지 스님에게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모든 승려가 마찬가지겠지만 의상 대사의 출가 직후 행적도 이후의 승려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효 대사와의 만남은 의상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사 전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두 젊은 승려의 만남은 이후 한국불교학의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비록 선택한 길은 서로 달랐지만 진정한 도반으로서의 관계는 승려생활과 학문 연구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또한 보덕화상과의 만남도 의상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가 국제적 안목을 키워 나가는 데 좋은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게 의미 있는 수행과 학문탐구를 계속하고 있던 의상은 인생의 최대전환기를 마련한다. 원효와 함께 불교 선진국이던 당나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와 의상의 입당유학에 관계된 일화는 워낙 널리 알려져 있지만, 두 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으면서 유학을 포기했고 의상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유학길에 오른다.

의상의 입당 유학은 당시 신라불교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너무도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두 스님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아울러 의상 대사가 중국 화엄종에 끼친 영향이라든가 유학 이후 신라 교학발전에 기여한 공적 등을 고려한다면 이때의 유학 결행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로 보는 것이 순리다.


원효대사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파랑새 현신으로 나타난 관음보살을 친견한 원효 대사.
도반(道伴)인 의상대사가 동해의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원효 대사도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로 향했다.

원효 대사의 경험은 관음보살이 현신하는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설화를 대표해준다.

원래 관음보살은 세상의 중생들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낙산사의 관음보살 또한 여러 모습으로 화현(化現)해서 교화했다는 경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 마리 파랑새로 변한 관음이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는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물론 지극한 정성과 독실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파랑새는 그 모습을 나타낸다.
원효 대사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 대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 역시 '벼가 없다'고 장난으로 대답했다.

스님이 다시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스님이 물을 청함에 연인은 그것을 빨던 물을 떠서 주었다. 스님은 그 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들판에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스님은 비로소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곧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렀다.

이어 스님은 관음성굴에 들어가 그 진용(眞容)을 보려했지만 파도가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범일 국사

굴산조사(堀山祖師) 범일 스님
낙산사의 중창주인 범일국사. 현대불교 자료사진.
역시 낙산사와의 인연이 깊다.
786년 화재로 인해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 소실됐었는데 858년 범일 스님에 의해서 중창의 역사를 통해 거듭나게 된다.
특히 이 당시 세 칸의 불전과 정취보살상을 짓고 봉안했던 역사에 인연해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들불로 인한 화재로 사찰의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는데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낙산사를 중창한 범일 국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명주(明州)에 있는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왼쪽 귀가 잘린 한 스님이 말석(末席)에 앉아 있다가 스님에게 말했다.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계(溟洲界)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윽고 스님는 여러 곳을 두루 다니다가 염관 제안스님으로부터 법을 얻고 회창 7년(847)에 고국으로 돌아 왔다.

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는데, 858년 2월 15일 밤 꿈에 전에 중국에서 보았던 스님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언약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렇게 실천이 늦습니까?”

조사는 놀라 깨어 수십명을 데리고 익령 가까이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물어보니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산다 하므로, 그 이름을 알아보니 덕기(德耆)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는 한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늘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더니 하루는 그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조사는 놀랍고 기쁘기도 하여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그 아이가 놀던 다리 밑에 가서 찾으니, 물 속에 석불상 하나가 있었다.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예전 중국에서 만났던 그 스님과 같았다. 곧 정취보살이었다.

이에 조사가 절 지을 곳을 점쳐 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하므로, 불전 3칸을 짓고 그 상을 모셨다.


조신

강원도 영월군 대화산(大華山)에는 세달사(世達寺)가 있었다. 의상 대사의 손제자(孫弟子) 신림(神琳)스님이 이 절에 주석했던 사실로 보아서는 8세기 중반 무렵에 창건된 화엄종 사찰로 보인다. 이 세달사에 딸린 부속 농장인 장원(莊園)이 강릉에 있었는데, 젊은 승려 조신(調信)이 장원에 파견되어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신은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짝사랑하여 맺어질 수 있도록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날마다 기도햇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그 여인은 결혼하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상 앞에서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꿈을 꾸었다.

사모하던 아가씨가 찾아와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속으로 스님을 사랑했지만 부모님의 명령을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자 다시 왔습니다."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함께 향리로 돌아가서 40여 년을 함꼐 살았다. 자녀 다섯을 두었지만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웠다. 10여 년을 사방으로 돌아다님에 옷은 찢어지고, 열 다섯 살 큰 아이는 굶어 죽기까지 했다.

그들은 네 자녀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의 길가에 띳집을 짓고 살았다. 늙고 병들었으며 또한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열 살난 딸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개에 물려 울면서 와서 부부 앞에 눕자 부모도 흐느껴 울었다.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갑자기 말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다웠고 나이도 젊었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고운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두어 자 옷감이 생겨도 당신과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지 15년, 정은 더할 수 없이 쌓였고 사랑은 얽히고 설켜 정말 두터운 연분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노쇠와 병고는 날로 더욱 깊어가고, 굶주림과 추위는 날로 더욱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한 칸의 곁방, 한 병의 간장의 구걸도 사람들은 용납해주지 않았고, 수 많은 집 문전에서의 수치는 무겁기 산더미 같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어도 그것하나 면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얼굴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같고, 굳고도 향기롭던 그 기약도 한갖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구려!

당신에게는 내가 있어서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곰곰히 지난 날의 환락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번뇌로 오르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모여 있다가 함께 굶어죽기 보다는 차라리 짝없는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순경(順境)일 때는 붙들고 역경일 때는 버리는 것이 인정의 차마 하지못할 짓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가고 머무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오,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합시다."

조신은 아내의 제의를 듣고 무척 반가워했다. 네 아이들을 각각 둘씩 나누어 갈라서려 할 때 아내가 다시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자신은 관음보살상 앞에 엎드려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쇠잔한 등불은 어스름한 불그림자를 너울거리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튼날 아침에 보니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망연히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에의 뜻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된 생애에 대해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 백년의 신고(辛苦)에 시달린 것 같았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듯이 없어져 버렸다. 이에 관음보살의 모습을 대하기가 부끄러워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그리고 해현(蟹縣)으로 가서 꿈에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보니 그곳에서 돌미륵이 나왓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 봉안하고, 경주로 돌아가 장원 관리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들려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았다. 그 후 조신이 어느 곳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관련 링크 : 부다피아 낙산사 홈페이지 가기

현대불교 DB |
2005-04-07 오후 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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