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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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 입은 낙산사 성보문화재 어떤 게 있나?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에 불어 닥친 화마로 인해 이곳 대부분의 전각과 문화재가 피해를 입었다.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은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녹아버렸고,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인 원통보전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인 홍예문이 전소됐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6호인 홍련암은 무사하나 주변의 요사채는 불길을 피하지 못했으며 칠층석탑도 새로 감정이 필요할 정도로 화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원통보전을 포함해 일원이 그 자체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인 낙산사의 성보문화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본다.



낙산사 동종 - 보물 제479호
이번 화재로
낙산사 동종. 현대불교자료사진
인해 낙산사 종각이 불타버렸다. 그 안에 비치돼 있던 동종 역시 화마를 피할 수는 없었다.
1469년(예종1)에 조성됐으며 높이 158cm, 입지름 98cm, 높이 36.8cm로 된 구리종이다.
중앙에 세 가닥의 굵은 선으로 띠를 돌려 상하로 구분한 종신의 상부에는 양각된 4구의 보살상이, 보살 사이에 4자씩 범자가 새겨져 있으며, 보살상의 어깨에는 16자의 범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9.5cm의 가로띠를 돌린 것이 두드러지는 동종의 하반부에는 그 안에 고사리 모양의 물결무늬가 선명하다. 어깨 부분에는 홑잎, 연꽃 36송이가 둘러져 있고 그 꽃 끝에 삼각형으로 세 꽃이 장식되었다. 정상에는 좌우 2마리의 용이 서로 반대쪽으로 연결되었고, 발과 몸의 일부가 끈을 다는 부위를 이루어 매우 사실적이고 웅대한 기품이 넘친다는 평가다.
조각 장식에 있어서 형태가 뚜렷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조선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혀왔다.



낙산사 원통보전. 현대불교자료사진


낙산사 원통보전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

관음전의 다른 이름으로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절의 전각을 가리켜 원통보전이라 한다.

낙산사의 원통보전에는 보물 제1362호인 건칠관세음보살상이 독존으로 봉안돼 있는데 원통전이 이번 화재로 전소됐음에도 불구 이 보살상은 무사히 지켜져 현재 홍련암에 모셔지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 받은 후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인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서 보듯 낙산사 원통보전은 창건시절부터 그 역사를 함께 한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 사굴산파 개산조(開山祖)인 범일 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낙산사 홍예문. 현대불교자료사진


낙산사 홍예문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 입구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돌문으로 1466년 세조가 이 절을 방문했을 때 강원도 26개 고을이 힘을 모아 26개의 화강석을 무지개 모양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좌우 양쪽에 강돌로 이 문 위까지 성벽 같은 벽을 쌓아 낙산사와 바깥세상을 구분짓는 역할을 했으며 석문 위에는 1962년에 건립한 누각인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다.

홍예문 또한 그 주변의 매점과 함께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낙산사 의상대.


낙산사 의상대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

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당시 산세를 살핀 곳이자 의상 대사의 좌선 수행처라고 전해지는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위치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원형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1925년 낙산사 주지 만옹 스님이 새로 지은 정자다. 예로부터 의상대라 불렸지만 이 시점에서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5년에 한 차례 중건,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과 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 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혔고 현재까지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의상대는 안내판과 휴게소만 피해를 입었을 뿐 다른 곳은 이번 화재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6호

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창건한 법당으로 관음굴(觀音窟)이라고도 한다.
홍련암은 의상대사와 관련한 독특한 유래가 전해진다.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이 입산을 하는 도중에 돌다리 위에서 색깔이 파란 이상한 새를 보고 이를 쫓아갔다. 그러자 새는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의상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7일 7야를 보내자 깊은 바다 속에서 홍련(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성취되어 무상대도를 얻었으므로 이곳에 홍련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법당 안에는 높이 52.5㎝의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 봉안돼 있으며 제작연대가 불기 2984년 유(酉) 2월 23일로 되어 있는 탱화(幀畵) 등 6점이 있다.
법당 입구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石燈)이 좌우로 벌려서 2기가 있고, 홍련암 입구에 요사(寮舍) 1동이 있는데 바로 이 건물이 이번 화재의 피해를 입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불에 탔다.



낙산사 칠층석탑 - 보물 제499호

이번
낙산사 칠층석탑.
화재에서 칠층석탑이 입은 피해는 크진 않았으나 정밀한 감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낙산사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높이 6.2m의 조선시대 석탑으로 본래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3층으로 쌓았다가 조선시대 세조의 명을 받은 학열(學悅)스님이 9층으로 다시 쌓고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가 마련돼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돼 있다. 단층기단으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아래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해 신복사터 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판단하는데, 이것은 동해안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지니는 공통 양식 계열에 속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손상된 적도 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했다.



낙산사 사리탑 - 강원도유형문화재 75호

해수관음상
낙산사 사리탑비.
앞에 있는 관음전 옆의 숲속 길로 들어가서 약 100미터 가량 내려가면 숲 속에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 있다.
이 사리탑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탑(浮屠塔)으로 조선시대 중기인 1692년(숙종 18)에 석겸(釋謙)스님 등이 대원(大願)을 발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1683년에 홍련암에서 도금불사를 거행할 때 문득 방안이 서기(瑞氣)로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스님들이 그것을 들어보니 유리처럼 광채를 내었다. 스님들이 기뻐 말하기를 “이 같은 상서로움이 옛날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세 번째니 얼마나 반가운가”라고 말했다.

이에 석겸 스님 등이 이 탑을 쌓고 그 구슬을 봉안했는데 그 공사가 무려 9년이나 걸렸다.

그리고는 탑이 완성된 이듬해 수춘거사(壽春居士)라는 문사(文士)를 초빙해 유래를 탑비(塔碑)에 적었는데, 이 탑비는 현재 홍련암 옆에 있다.



낙산사 담장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원통보전 주위에 그 둘레를 네모 낳게 방형(方形)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원장(垣墻)이다.

사찰 건축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대표적 담장으로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하는데,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담장 안쪽의 벽은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를 차례로 다져 쌓아 담벽 앞면에 기와로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둥근 화강암을 바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화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하고 있으며 본래 터만 남아 있었으나 근래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했다. 크기는 전체 길이 220m, 높이 3.7m이다.


관련 링크 : 부다피아 낙산사 홈페이지 가기



권양희 기자 | snowsea7@buddhapia.com |
2005-04-07 오후 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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