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자2: 주인공이 저의 근본임을 일깨워주시고, 주인공이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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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울산에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월달에 어떤 분이 문서를 위조해가지고 남의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를 이전해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사기죄, 사문서 위조 등으로 구속이 되었는데 그분이 우연히 저의 사무실을 찾아오셔서 저에게 사건을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그 땅을 돌려주고 그리고 여러 가지 정상 관계를 판 사람에게 설명드리고 해서 재판이 일단 심리가 종결되고 선고가 남았는데 2월 말에 선고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남의 땅 문서를 위조해서 넘겨 갔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이가 많고 순수한 농부였지마는 법원을 기만해서 남의 권리를 침탈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정상 관계는 상당히 나빴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려가 되어가지고 선고가 나는 날 아침에 집에서 출근하기 전에 주인공에 관하기를 어떻게 관했느냐 하면은, ‘비록 그 사람이 남의 땅을 침탈하였다 하지만 이미 본 주인에게 땅이 돌아갔고 그리고 그 사람이 2개월여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참회의 생활을 했다면 그것으로서도 충분히 그 사람의 죄는 사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굳이 60이 넘은 피고인을 감옥으로 보낼 것이 아니고 한번 용서하여서 다시 사회에서 남은 여생을 잘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하고 주인공에게 관하여서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고 내용을 저희 직원들이 보러 가고 저는 다른 법정에서 재판을 하고 있는데, 10시 선고였는데 11시 40분경에 저의 직원이 제가 일을 하고 있는 법정으로 왔습니다. 직원이 와서는 “10시 선고인 재판이 3시로 연기되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담당 판사님을 찾아뵈니까 여러 가지 정상 관계는 참작할 점이 많이 있지마는 어쨌거나 스스로 남의 땅을, 그것도 법원을 기만해서 등기를 넘겨갔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 않겠느냐? 만약에 그 사람이 용서된다면 법원의 권위가 부서지지 않겠느냐 하는 아주 단호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저의 마음속에는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 판사님의 그런 말씀 속에서 은산철벽의 그런 절망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판사님이나 저나 그 피고인이나 모두가 한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는데 굳이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판사님에게 다시 한 번 그 기록을 검토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판사님께서 선고를 3시로 연기한 이유가 어떤 문서 하나를 좀 더 확인할 게 있어서 선고를 연기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문서를 직접 찾아가지고 오후 2시 20분경에 다시 그 판사님을 뵈러 갔습니다.
판사님께 서류를 드리고 나서 판사님이 다시 서류를 검토하니까 그 서류가 기록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 제가 갖고 간 그 서류가 필요가 없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 판사님 하시는 말씀이,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용서하기는 힘들겠다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본인의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옆에 있는 판사님들하고도 상의를 해가지고 다시 한 번 더 결심을 하겠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 그 순간까지도 저의 마음은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되는 것도 주인공이 하는 것이고 되지 않는 것도 주인공이 하는 것이다.’ 하는 강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판사실을 나오면서 주인공에게 그렇게 관하고 아침에 그렇게까지 관하고 나왔는데 왜 그 사람이 용서받을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인공에게 주었다 뺏었다 하면 주인공이 결재를 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지, 주인공에 맡겨야지.’ 하는 생각을 다시 가졌습니다. 그러고 재판을 하고 있는데 2시 50분경에 그 판사님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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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용서를 도저히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미리 하려고 그래서 다시 찾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판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생각을 바꾸셨노라고 그러시면서 워낙 죄질이 중하기 때문에 용서는 하되 용서하는 기간을 길게 잡겠노라고 하시면서 3시에 선고를 하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셔가지고 육십 넘은 노인을 석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판사님이 차를 한잔 하자고 저를 사무실로 좀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판사실에 들어가니까 그 판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로서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날 40여 명의 피고인을 선고를 하면서 유독 그 사람만을 3시로 연기를 했고, 그 서류 또한 굳이 그 당시에 판단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었는데 3시로 연기했고, 만약에 10시에 그 판결이 선고되었다 그러면 징역 1년이 그대로 선고되었을 텐데 그 피고인이 상당히 운이 좋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판사님도 연세 많으신 분을 그렇게 용서하고 나니까 오히려 당신도 마음이 개운하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는 그 순간 너무나 주인공의 도리에서 감사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감사함은 말로 두루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날 오후에 울산지원 법당에 가서 스님한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 뒤에 몇몇 분들한테도 그런 말씀을, 주인공의 나툼이 얼마나 위대한지 거기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그러한 주인공의 나툼에 대해가지고 설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어떤 의문을 갖느냐 하면, 그것이 주인공의 나툼이라 하지만 그것이 관법(觀法)이라든가 놓는다든가 그러한 믿음의 힘이 아니고 이미 그러한 것이 그 피고인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운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나가지고 그렇게 용서를 받는 그러한 기회를 가졌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물론 스님께서 말씀하신 녹음테이프의 비유를 이용해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 스님: 그러니깐 말입니다, 자기의 팔자 운명은 자기가 지어가는 것이지 어디에 뭉쳐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뭉쳐져 있고 차안(此岸)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런 것이지 자기 마음이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도 없고 그거는 우연이라는 게 없어요.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됐기 때문에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또 한마디 해드릴 건 만약에 변호사님이 바로 자기 일이었다면, 자기 아버지나 자기 일이었다면 어떻게 또 생각을 했을까 이겁니다. 자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 그렇게 됐다면 바들바들 했을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남의 일처럼 턱 맡기고 턱 놔뒀을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그렇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서 가루가 돼서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태연해라. 한번 맡겼으면 태연해라, 이런 얘기를 가끔 하죠. 그런데 내 일이 되고 가까우면 더 바들바들 떨고 남의 일이면 착 맡기고 턱 아주, 그럭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일은 되는데 왜 내 일은 안 되느냐 이러는 겁니다. 그 원인입니다, 바로. 여러분하고 이렇게 토론을 하는 반면에 그런 틈에서 무엇이 나오는 것도 알아볼 수 있고 들어볼 수 있는 거죠.
▲ 질문자2: 네, 고맙습니다.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관법(觀法)과 맡기는 법에 대해서 한마음 공부를 해오면서 사실 여러 가지 부딪치는 장애들에 대해서 놓는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맡기고 관하면서 나가다 보면 실질적으로 고로 닥쳐오는 그런 것들이 고로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어떠한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 ‘이렇게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가 무엇인지, 본래자성불이 무엇인지 자(子)와 부(父)가 상봉하는 순간을 굳이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되느냐?’ 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쭙겠는데 부와 자가 상봉하는 그 순간의 모습은 어떠하며, 부와 자가 상봉하는 그 순간을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는지 한 말씀 바라겠습니다.
▲ 스님: 예. 아까 염주 얘기 했죠? 지금 사람이 마음과 마음 줄에 꿰어서 육신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염주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하면서도 부와 자가 상봉하고 있는 겁니다. 상봉하면서 서로 가만히 있으면 부가 되고 생각을 냈다 하면 자가 되는 겁니다. 자동적입니다, 이게. 여러분이 다 그렇게 하고 갑니다. 그런데 그 뜻을 모르니까 과거 부와 현재 자가 상봉해야 된다. 상봉하지 않으면 가히 채찍이 나한테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이 피안의 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형성시킨 것도 그 줄이니까, 즉 말하자면 과거에 살던 나니까 자꾸자꾸 그러니까 그것을, 부가 자와 둘이 아니게 됐을 때에 묘법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부와 자가 한데 합쳐졌을 때는 자유스럽죠. 좀 생각을 했다 할 때는 그냥 부가 한데 합쳐주니까 생각을 하는 것도 법이고 또 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는 아예 조용하고 적정이 되고요. 부가 되니깐, 자가 생각이 없이 그냥 부가 하나로 되니까 적정입니다. 그래서 이리로 가도 하나요, 저리로 가도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부처님도 법신과 화신이 둘이 아니다 이렇게 되죠.
▲질문자2: 고맙습니다. 주인공이 저의 근본임과 주인공이 저의 모든 것을 다함과 일체 현상이 다 주인공의 나툼임을 굳게 믿고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스님: 감사합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세계의 이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팽개치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건 안 되는 일이에요. 줄과 알이 반드시 꿰어져 있어야 염주라는….
▲ 질문자3: 안녕하세요, 스님. 저는 광주지원의 청년회원인데요, 공부해나가다 보면 어느 때는 잘 잡고 가는데 이제 잘해봐야 되겠다 하고 마음이 탁 나면 그 마음이 꾸준히 가다가 어느 때는 갑자기 해이해져요. 해이해져가지고요, 조금 탁 놔버리는데 또 놔버리면 그냥 그렇게 놔버린 기간 동안 내가 해이해졌구나 하고 괴로워해요. 괴로워서 다시 잡아야지 하는데 또 안 잡아지고 그렇게 계속 반복을 하다보니까요, 조금 잘 잡아갈 때는 기분이 즐거운데, 나쁜 기분이 아니라 괜찮은 기분이 드는데 그때는 이거 좋구나 하고 또 그렇게….
▲ 스님: 그 요건을 말하자면 내가 잘될 때는 좋고 잘 안될 때는 마음이 답답하죠?
▲ 질문자3: 예.
▲ 스님: 그런데 답답한 마음도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거고 좋은 마음도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거거든. 딴 구멍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마음이라는 선장이 그거를 다스릴 때, 답답한 것도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거니까 답답하지 않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되돌려놔야지 만약에 답답한 거를 딴 걸로 알고 좋은 거를 딴 걸로 안다면 안 돼. 그거는 답답한 거나 좋은 거나 슬픈 거나 모든 안되는 것 되는 것이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 말이야. 그러니까 거기다 되놓으라고. 그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안 되는 건 가르치기 위하고 경험하게 하기 위하고 발전되게 하기 위함이지 그것이 안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안되는 것도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이끌어주는구나!’ 하고 거기다가 되놓기를 바래요.
▲ 질문자3: 그런데요, 스님 법문하실 때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좀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다보니까요, 이게 너무나 나에게, 내가 지금 나이도 어린데 이걸 계속 이렇게 하면 너무나 힘들 거다. 근데 ….
▲ 스님: 이거 봐요. 계속 놓는 게 아니라 계속 놓고 돌아가는 거지. 왜 계속 놓기만 하고 있나? 그럼 목석이게? 그러니까 그 말 떠듬떠듬하는 것도 네놈이 그렇게 하는 거니까 ‘그렇지 않게 좀 침착하게 하게끔 해줄 수 없어? 너밖에 없어.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러고 거기다 맡겨, 응? 말을 그렇게 그냥 복잡하게 자꾸 자주자주 하면 상대방이 듣기에 침착하지 못해. 그러니까 그것도 고치라고. 내가 고쳐준다는 게 아냐. 고치라구!
▲ 질문자3: 예.
▲ 스님: 그렇게 해봐!
▲ 질문자3: 열심히 해서 고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요, 공부를,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공부를 하시다가 정말 바르게, 정말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거든요. 정말 바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냥 스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것만 따라서 하면 그게 바른 것인지. 그런데 이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요. 어떻게….
▲ 스님: 이거 봐. 나는 떨어져 있는 사람이고 자기는 생활을 지금 당장 가정에서 해나가고 있잖아? 그러면 보고 듣고 행하는데 그 생각이 들고 생각이 나고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생각이 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러는 사람 아닌감? 누구한테 따라 하라는 게 아니야. 자기가 생활해가면서 생각하는 것은 다 그놈이 하는 거라 이 소리지. 그러니깐 돌려서 구정물이 들어오면 새 물로 대치해서 써라 이런 식이나 똑같애.
▲ 질문자3: 예. 감사합니다, 스님.
▲ 질문자4: 포항지원에서 왔습니다. 입시 때 올리는 축원문에 대해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입시 전에 축원을 올리는데, 축원을 스님들께 올리는거 하고요, 또 정성금을 불전함에 넣고 스스로 하는 거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스님: 그거는 스님네들더러 해달라기보다는, 스님네들더러 해달라면 의존하는 거죠. ‘저 스님네들이 오죽 잘해주랴.’ 하고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나 직접적이고 간편하게 내가 직접 올리고, 축원문을 찾아가지고 무슨 한 달을 외워준다거나 이런 거 다 헛거예요. 아시겠어요? 물론 다 헛거는 아니겠지만. 한생각이 중요한 거니까.
적든 많든 내가 정성금을 갖다가 놓고 정성을 들일 때 한마음으로 모든 스님네들, 큰스님이나 작은 스님이나 또는, 자기나 자기 아들이나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이나 모든 걸 한데 합친 게 주인공이라 그랬어요. ‘주인공, 너만이 꼭 이룰 수가 있고 침착하게 시험 보게 할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아주 지극하게, 자기 일이니깐 자기가 얼마나 침착하게 잘하겠습니까? 그게 제일이지, 벌써 한 다리 걸러가면 손등이 돼. 그러니까 침착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정성스러울 수가 없고. 그러니깐 본인들이 하란 얘깁니다, 본인들이.
▲ 질문자4: 감사합니다. 스님, 올해도 시험 보는 우리 한마음 가족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시생들이요. 그 마음들 한데 다 묶어서 스님 그 자리에 맡겨 놓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스님: 아니, 이것 좀 봐요? 또 맡겨 놓고 간대요. 아, 자기가 농사지어서 자기가 먹을 수 있고 자기가 물을 퍼먹으면 샘물을 그냥 풍풍풍풍 퍼먹을 수 있는데, 목마르지 않도록. 그런데 남한테 퍼달라고 한다면 그거 목마른 걸 기다려야 하고 그거 얼마나 불편해요?
▲ 질문자4: 스스로도 농사를 짓지만 스님께서도 한마음 내주십시오.
▲스님: 한마음은 본래 돼 있다니깐. 참, 요 묘법을 가르치기가 참 어렵군요.
▲ 질문자5: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제 근본자리에 감사드리며 또 그 근본자리가 있음을 가르쳐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항상 법당에 와서 예불을 올리거나 또는 어떤 의식을 행할 때에요. 궁금한 점이 많이 있으면서도 ‘아, 스님께서 그렇게 하시니까 그건 그런가보다.’ 또 여쭙고 싶어도 또 ‘혹시 이게 결례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궁금증은 많이 있으면서도 그냥 지나치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앞의 보살님이 얘기하실 때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희가 모르면서 하기 때문에 헛것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 그 많은 궁금증 중에서 세 가지만 스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여쭙고 싶은 것은요, 법당에서 행해지는 모든 재를 저희들이 지낼 때 우주떡을 굽는 방식에 있어서 항상 홀수로 굽는 것과 또 한 장, 세 장, 일곱 장, 아홉 장 그렇게 장수마다의 어떤 그 뜻이 있는지요? 그리고 왜 꼭 홀수로써 구워야 되는지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 스님: 이 세상만사가 변해서 돌아가긴 해도 돌아가는 거는 천차만별로 돌아가지만 돌아가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때는 세 개가 될 수도 있고, 이때는 두 개가 될 수도 있고, 이때는 하나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집는 데도 보는 거를 크게 볼 수도 있고 작은 걸 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걸 볼 수도 있고, 들더라도 작은 걸 들 수도 있고 큰 걸 들 수도 있고 아주 작은 걸 들 수도 있는 거죠. 그럴 때, 어떤 때는 작은 걸 들 때 한 손으로 집고 조금 큰 걸 들 때는 두 손으로 들고 더 큰 걸 들 땐 같이 들고 이러죠? 그러니까 어떤 집은 그저 한 조각을 부쳐놓더라도 세 조각이 될 수 있고 일곱 조각이 될 수 있다, 이런 걸 가르치기 위한 겁니다. 보이는 거는 한 조각이지마는 보이지 않는 데선 수만 수천 조각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이는 데서 볼 때 너무 소홀하지 않습니까? 먹는 사람도 그것 한 조각 가지고는 도저히 먹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일곱 조각씩 이렇게 그냥, 일곱 조각을 한 조각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깐 자유권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산 사람이 먹기 위해서 물건들을 만듭니다, 반찬을 하든 떡을 하든 합니다. 그럼 살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살기 위해서 물건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는 한다 하더라도 그 물건 아니라도 될 건데도 물건을 해야만이 되죠. 육체가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예요. 보이는 데서도, 물 자체가 컵만 있어도 안 되고 컵 안에 물이 담겨 있어야 이게 되죠. 시시때때로 빈 컵에다가 물을 담아 먹죠. 그래 시시때때로 무엇을 할 때는 그것을 아, 일곱 개든지 세 개든지 한 개든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을 여러분한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영령들이 전부 한마음을 통해서 일체 우주천 세계에, 도리천 세계에 모두가 한자리 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한마음으로 공식(共食)한다는 뜻을 여러분한테 알리기도 하거니와 그 영령들은 그 자리에 바로 출현하시기 때문에, 한자리를 하기 때문에 그 영령은 어느 한 상 차려놓은 것만이 아니라 전체에 한도량으로 삼아서 한 방석에 앉으시니 그렇게 좋은 일이다 이거죠.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조상들이, 즉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리고 재사 지낼 때, 스님네들이 안 차려놓고 지내든 차려놓고 지내든 스님네들이 아는 것만큼 영령들이 좋아요. 왜냐하면 그 스님네들이 아, 요거를 그 사람이 내가지고 얼마를 차리고, 요 상을 얼마 차렸다 요런 거를 스님네들이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깐 그 조상 영령들이 들어와서 스님네 마음을 탁 보니까 그것만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거 아는 것만치만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벗어날 길이 없죠.
그러나 여기 스님네들은 우주떡 하나 턱 해놓고, 이 떡은 우주 삼천대천세계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부처님이고 중생이 둘 아니게 다 잡숫고도 우주떡 하나가 되남는다, 이렇게 마음이 크니까 영령들이 들어와서 스님네 마음속에 탁 들어와 보니까 ‘아이구, 내 것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는 거고, 이렇게 됐을 때에 안도감과 그 시원하고 좋은 마음과 천도되는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죠.
▲ 질문자5: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여쭙고 싶은 것은 49재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분이 49재를 부치면 저희들이 얘기하는 7ㆍ1째 되는 초재에 회향을 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또 1ㆍ3ㆍ5ㆍ7 이렇게 쳐서 할 때도 있고, 또 7ㆍ7해서 또 7번을 다 해서 끝낼 때도 있고 그런데,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스님: 그것도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거죠. 육신의 칠성판에, 죽으면 육신을 갖다 칠성판에 모시죠? 그러니까 누구나가 다 여섯 개의 육근(六根)에 의해서 칠성이 아주 잘생겼다 이런 표현도 하죠. 그러니깐 그거를 비유해서 그거를 만든 겁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과거로부터 현실로, 미래로부터 또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그렇게 아주 간편하게, 사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냥 간편하게 사십구재 날까지 자식 된 도리로 정성을 지극하게 하기 위해서 삼세 번으로 하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 질문자5: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저희 불자들 중에서는 집에서 제사를 지내시는 분도 계시지만 기제사를 저희들 절에 부치는 분들도 많이 있거든요. 그럴 때 저희들이 집에서 지내는 그 마음과 절에서 지내는 것과의 어떤 차이점이랄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 스님: 그 차이점은 있겠죠. 스님네들이 공부를 해서 더 잘 아니까 영령들이 스님네들 마음하고 같이 하니깐 좋은 거고요. 또 한 가지는 여러분도 공부를 하시니까 지극하게 부모 생각을 하고 집에서 간편하게 먹을 거는 먹을 거대로 그냥 음식을 해서 지내고, 그냥 제삿상에는 간편하게 해서 그냥 지내는 것이 아주 더더욱 좋죠.
위패를 꼭 모셔놔야만 되는 건 아닙니다. 꽃 한 송이라도 갖다놓고 그렇게 하면 되고요. 또 한 분의 위패를 써놓지 않는 대신에 전체를 올리는 천혼문을 씁니다. 일체 조상님들 어떠한 분이라도, 할아버지의 아들이 있고 아들의 또 아들이 있고 이렇게 되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모두 친지 아닌 사람이 없으니까 일체를 다 넣어서 나는 덜 먹었다, 나는 왜 안 찾느냐 이렇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체를 넣으면 됩니다. ‘일체 조상님들! 모두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 하십시오.’ 하고 천혼문을 써서 해드린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죠. 그리고 나중에 주인공에 다 맡기시면 되고요.
※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78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