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25. 고려시대 13
국가의 말기적 증상은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대외적으로 원과 명의 양국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국가적 이익이냐를 두고 논쟁하다가 분파적 세력이 형성되었다. 또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할 뿐 아니라 그 규모가 대형화되고 피침지역도 삼남의 해역을 말할 것도 없고 중부 이북의 해안선을 따라 무차별적으로 침탈이 심했으며 때로는 내륙 깊숙하게까지 들어와 그 행태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국가재정이 궁핍해지고 농민은 물론 다농들까지 생산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사원에서는 백장청규를 다시 펼쳐서 흐트러진 선원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종교가 정치와 깊이 관련되어 그도 또한 쉽지 않았다.
중국도 홍건적이 봉기하여 사회가 혼란해지니 차의 생산 공급에 차질을 가져왔다.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다마사(사령부사)를 설치하고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① 함허대사(1376~1433): 법호는 득통(得通) 법명은 함허로 회암사의 무학 스님께 출가해싿. 차를 즐겨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다.
② 1254년 만든 선원청규가 이 때 간행된 태고 보우 스님의 <치문경훈(緇門警訓)>에 수록되어 전한다.
③ 다방리정: ‘무자년에 다방리의 우물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으로, 이때의 ‘다방리’는 ‘다방이 있던 마을’로 본다.
④ 왕홍(1379~1420): 명대 문인으로 차를 좋아해 요공(姚公)에게 보낸 다시가 전한다.
⑤ 송의 최고급 연고차인 용봉단차의 제작을 금지하고, 조다(造茶) 과정이 비교적 쉽고 차의 본성을 살린 산차(散茶)를 보급했다.
⑥ 사응방(1295~1392): 원명년간에 무신론을 주장한 학자다. 정주학 이외의 선(仙), 불(佛), 필(筆)을 배척했으며 차를 즐겨 ‘자명(煮茗)’ 같은 시를 남겼다.
⑦ 우치차는 남북조 말기에 등장하여 15세기를 거치며 그 명성이 일었으며, 좋은 차밭을 가져서 그 맥이 오늘까지 이어온다.
⑧ 능아미(1397~1471): 실정(室町) 중기에 활동한 무인 출신의 차인이다. 엄격한 형식을 바탕으로 하는 동산류(東山流)를 구체화했다. 즉 다구의 감별, 점다법, 대자(臺子)의 장식법 등을 체계화했다.
<한국>
고려 말
1376 함허대사(涵虛大師) ①
1378 선원청규 ②
1379 일본 승려 법인(法印)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 일본에 사신 파견, 금구(禁寇) 요청
1384 한수의 죽음
1388 위화도 회군
1390 내시, 다방을 이번(二番)으로 운영
사대부가의 제의(祭儀) 발표
다방리정(茶房里井) ③
1391 부녀자 사찰 출입 금지
정도전의 척불소(斥佛訴)
1392 조선의 건숙
1393 경국전(經國典) 편찬, 전제개혁
1398 변중량의 죽음
1399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중국>
명대
1379 왕홍(王洪) ④
1382 명의 운남 평정
1383 보이차란 이름이 등장
1387 상세(商稅) 부과
1391 용단차 제조 금지 ⑤
다호의 요역 면제
1392 사응방(謝應芳)의 죽음 ⑥
경덕진 관요(官窯) 설치
<일본>
남북조
@ 후소송(後小松) 천황
1392 남북조 통일
우야차(宇冶茶) 등장 ⑦
1396 금각사 건립(족리의만)
1397 능아미(能阿彌)의 출생 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