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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다른 사안에 밀려 종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던 성보보존법 개정안이 이번에 통과될 수 있었던 데는 올 가을로 예정돼 있는 불교중앙박물관 개관이 한몫했다. 개관 준비 중인 불교중앙박물관의 법적 근거 마련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간 성보박물관은 근거 법령이 없어 ‘유령기관’이라는 오명을 면치 못하던 차였다. 뿐만 아니라 관장·학예연구사 등 종사자들의 지위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개정된 성보보존법은 제16조에 성보박물관을 “총무원 및 교구 본·말사에서 성보의 보존, 관리, 연구 등을 목적으로 국가의 박물관 진흥법에 의거하여 박물관 기준에 부합하도록 설립한 박물관·전시관·유물관”으로 규정했다. 또 제20조에 관장, 학예연구실, 사무국 설치 등에 관한 규정을 둠으로써 지위와 역할을 명시했으며, 제19조에는 성보박물관의 사업범위도 규정해놓았다.
성보관리인(사찰 주지 등)이 수행해야 할 역할 규정도 분명히 했다. 제5조에 따르면 성보관리인은 성보 발견·멸실·도난·훼손이나 문화재 지정 또는 경내 지표조사 및 시·발굴조사시 총무원장에 보고해야 하고, 성보의 변동사항을 성보대장에 기재해야 한다.
성보관리 의무 이행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벌칙조항도 신설됐다. 제23조 벌칙조항에 의하면 사찰 주지가 고의로 해당 사찰 성보의 도난·멸실 등 발생시 공권정지 5년 이상, 제적의 징계도 받을 수 있다. 과실로 성보를 손괴했을 때도 면직의 징계가 가능하다.
성보박물관 및 관련 종사자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했고 성보관리자 처벌 조항까지 삽입한 것은 성보보존에 대한 종단의 의식이 진일보했음을 반증한다. 하지만 지난 1월 27일 입법예고된 개정안에 포함돼 있던 학예사 채용 의무화가 무산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실적으로 전문인력 채용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사찰이 많다는 이유로 의무 사항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현장 학예사들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한 사람 채용도 부담스러워하는 사찰의 현실은 박물관 종사자와 사찰 사이의 인식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간극은 학예사의 이직으로 나타나고, 박물관 전문역량이 축적되지 못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학예사는 성보박물관의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 없어선 안 되는 존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물의 관리뿐 아니라 교육과 특별전 기획 및 진행, 다양한 학술활동 등이 모두 학예사 손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학예사 없는 성보박물관은 유물 수장고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미 개관한 성보박물관들 가운데 대다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데는 전문 인력 부족, 전략 부재 등의 요인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예사 채용 규정 완화는 박물관 활성화에 역행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부추김 속에 짓고 보자는 식으로 성보박물관들이 건립되고 있어 부실 박물관 양산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학예사 1인 이상 채용이라는 최소한의 요건마저 명문화하지 못한 것은 박물관에 대한 종단의 통제를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현행 ‘박물관 및 미술관진흥법 시행령’은 1인 이상의 학예사가 있는 박물관만 시·도 등에 등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성보보존법이 이처럼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함에 따라 성보박물관 활성화는 많은 부분 소속 사찰의 박물관 육성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됐다. 수덕사 근역성보관장 정암 스님은 “한달에 500~700만원의 적자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을 건실하게 운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면서도 “불교문화의 보고인 박물관이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