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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빌딩을 보던 처연한 눈으로, 그러나 이제는 뛰는 심장을 쏘기 위해 가늠자를 노려보는 눈으로. 기억은 그렇게 변한다.
<지식인의 죄와 벌>은 기억, 그 가운데서도 시대의 기억을 책임지는 기자와 작가의 책임을 묻는 책이다. 책은 공평하다. 1944년 8월에서 이듬해 12월까지 프랑스에서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이 저마다의 ‘말의 무게’를 가진 채 ‘대숙청’을 향해 달려간다.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 출신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펜을 든 것은 파리가 해방을 맞은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서다. 1944년 8월 30일 카뮈는 납활자 자국이 선명한 날선 신문 사설 하나를 내놓는다. “이 자리에서 어느 누가 감히 용서를 거론할 것인가? 칼은 칼로밖에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기를 들고서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에, 누가 감히 잊어버리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내일을 담보해 주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근거한 정의 자체이다.”
‘기억의 정의’를 요구하는 한 켠에선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의 쳇바퀴보다는 더 나은 것을 바란다”(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논리가 고개를 든다. 그러나 프랑스는 단호했다. “우리의 모든 과거의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프랑스 문예>)
프랑스는 때론 비이성과 권력의지가 혼합된 숙청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동족에겐 칼을, 이민족에게는 달콤한 펜과 혀를 굴렸던 부역자들을 ‘기억’하는데 결국 성공했다.
프랑스에서도 악몽처럼 머리를 짓누르며 기억을 왜곡시키려는 헛된 노력들이 있어 왔다. 지은이는 “부역자들이 저지른 잘못과 범죄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숙청 주도자들의 잘못을 거론하려고 기를 쓰는 자들”을 기억하라고 딱 잘라 주문한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의 부제는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두려움’이다. 그러나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기억하는 자들이다. 모든 기억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은 기억은 정의를 보장한다.
누구 말처럼 “도둑같이 뜻밖에 찾아온” 우리의 해방은 어떠했는가. 그 해방공간의 기억은 누구의 것이며, 지금-여기 반민특위의 좌절조차 남의 기억으로 대신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 <지식인의 죄와 벌>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두레 펴냄/1만2천8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