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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되는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초도 떠나지 않고 움죽거린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여러분을 움죽거리면서 지켜보시면서 생각해보십시오. 지수화풍을 그냥 물질적인 요소라고 아무렇게나 생각하시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여러분이 과거를 지나서 현실로 나오면 과거에 자기가 한 일을 까맣게 모르니까 현실의 모든 것은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한 대로.
그런데 지수화풍이 처음에 생겨날 때는 온기를 찾지 못해서 흙과 바람 또는 물 이 뒹굴고…. 그 시련과 더불어 뒹굴었기에 온기가 생기고 온기가 생김으로써 생명체가 생긴 겁니다. 그 생명체가 생김으로써 얼마나 고달픈 시련과 고통과 체험과 모든 것을 종합해서 쌓아올려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진화가 되는 거죠. 그래서 생명체가 생긴 것도 그렇지마는 생명체가 생겨서 삶을 엮어 나올 때에 우리는 공생으로서 공체로서 공식화하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물에서 각종의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 그 속에 그 역경이라는 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꽃이 피어 있는 걸 보면 피었나보다, 물이 흐르면 흐르나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니깐 그렇지 우리 자신이 지금 그렇게 구르고 있다면 얼마나 뼈아픈 사실이겠습니까? 먹고 먹히면서 쫓고 쫓기면서 그리고 잉태를 하고 죽어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물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서로 협동정신을 가지고서 모든 생물들과 더불어 같이 사는 겁니다. 물도 생명이 있는 반면에 생명이 왜 있게 되는지? 생물들의 아가미에선 끈적끈적한 에너지가 나오고 액체가 나옵니다. 또는 젖 같은 액체가 나오죠, 분비물이 나오죠. 모든 생물들한테서 나오는 그 모든 게 물의 에너지가 되는 거죠.
그러면 또 물은 무엇을, 수행의 길에 진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줄 수 있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위를 아래로, 아래를 위로 이렇게 물을 뒤집는 것도 역시 그 생물들을 이끌어가자는 뜻입니다. 그 여건은 태양열이든지 공기력이든지 또는 먹고 살기 위한 에너지든지 모든 것을 골고루 섭취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 생물들만 먹는 거 아닙니다.
위로 올려서 또 인간들에게도 주고요, 또 태양계로도 오르고요. 모든 혹성들은 다 같이 지금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유가 없는 이런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여유 있게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는 마음의 발전을 이루어야 됩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생각을 했다면 그것을 바로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자책감을 가지고 항상 ‘나는 이런 걸 못 해, 난 중생이니까.’, ‘나는 이렇게 죄가 많으니까 이건 벗어날 수 없어.’
이렇게 자책감을 가지고 관습에 의해서 매달리고 습관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 습을 떼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 마음공부를 해야만 되는 거죠.
그래서 수없이 물속에서 휘달리고 휘달리는 그 시련, 아까도 얘기했지만 고통과 체험과 또는 자기 관습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런 경험을 좇음으로써 수없는 날을 눈코 뜰 새가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육지로 올라오게 되고 형성이 되는 거죠. 그러나 육지로 올라와서 형성이 됐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맨 마지막에 인간으로 진화가 됐습니까? 인간으로 진화가 됐다 하더라도 얼마만큼 굴렀습니까?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구르고 굴러서 잘못되고 잘되고 ‘이것은 잘못하는 거다, 잘하는 거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 중에도 차원이, 천차만별의 차원이 있어서 그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고, 습에 끄달려서 바깥으로만 물질세계에만 끄달리고 헤매고 도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형성이 되고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모습을 바꿔가면서 수없이 겪어 나온 장본인들입니다. 그래서 장본인들이 이렇게 했어도, 부처님께서 사람 되기 어렵다고 했고 정법 만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공부 하는 이 도리를 만나는 게 극히 어렵다 이랬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인 거죠.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즉 말하자면 차단된 물 컵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죠. 우리가 생각해보면 차단이 된 세상이 아닐까요.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대로 못 하고 살고, 살고 싶어도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일일이, 건건이 걸리는 세상이 바로 이 어항 속입니다. 창살 없는 감옥이죠.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그런다면 손 들어보세요. 이런 사실 속에서 살면서 마음의 발전으로 인해서 창조력과 자유인의 기상으로 높이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영향력이 필요하죠.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인간이 됐다면 물론 고깃덩어리를 잡아먹히진 않겠죠. 그러나 지금 시대를 가만히 보십시오. 동물이나 어떠한 것도, 일차적으로 우리도 동물이니까요. 차원 낮은 동물이라고 해서 먹고 먹히고, 사람들한테 먹히고 이렇게 수없이 생겨나고 수없이 죽어가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 어떡하고 있습니까? 고깃덩어리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게 아닙니다. 정신이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세계입니다. 정신을 잡아먹히면 그건 허수아비와 같습니다. 누가 잡아먹는다고 하고 잡아먹나요. 말없이 잡아먹히는 거죠. 그러니 말없는 데서 마음의 발전을 해야만 정신계의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고 자유스런 인간으로서 정신을 잡아먹히지 않고, 나만 잡아먹히지 않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주고 이끌어주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인의 모습이라면, 얼른 쉽게 말해서 염주 알이 있다, 염주 알이 ‘삼천(三千)’하면은 줄이요, ‘대천세계(大千世界)’하면은 알입니다. 요거를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보이시며) 하나 생각을 해보신다면 모든 게 종합해서 염주 알이라고 표현을 해봅시다. 본래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염주 알과 염주 줄이 있기 때문에 알이 생긴 거지 줄도 없는데 무슨 알이 생깁니까. 줄이 있기 때문에 염주 알이 있고 염주 알이 있기 때문에 줄이 있는 것이지, 그래서 이름을 ‘염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정자 난자가 한데 합쳐져서 우리가 몸을 빌어서 이렇게 탄생을 해서 형성된 자체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알을 꿴 줄처럼 본래 정신계와 물질계가 합류화 돼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신계는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고 물질계에만 연연해서, 먹고 사는 데만 연연하지 마세요. 먹고 사는 거야 인생이 태어났으면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아요. 먹고 사는 거야 어쩌면 못 먹고 살까요? 움죽거리면 먹고 사는 건데. 어떡하면 어디서 이렇게 왔기에 어디로 가는 건지 또는 지금 무엇을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런 것도 좀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염주 알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영 염주 줄은 믿질 않아요. 왜 염주 꿴 줄을 믿지 않습니까? 염주 줄은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고 염주 알을 꿰지 않았으면 무효입니다. 염주 알을 꿰었기 때문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겁니다. 부처도 인정을 하고 종교도 인정을 하고 세상도 인정을 하고 세계도 인정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알이 줄을 믿지 않다니, 그것이 반야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것을 쥐고서, 우리 이 지구 자체도 섬입니다, 섬! 마음의 줄에 꿰어서 돌아가는 섬입니다. 모두가 꿰어서 돌아갑니다. 우리들의 생명에 모든 에너지와 서로 더불어 같이 붙고 같이 하는 물과 바람, 공기 모두가 한데 합류화돼서 태양계로나 은하계로 통솔을 하면서 서로 돌아가는 이 이치가 바로 염주알 같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개별적인 한 줄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항상 내가 말을 하죠. 우주하고 인간의 근본하고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고요. 발전소 하나를 해놓으면 모두 가설은 됐으나 진짜 전깃불을 켜려면 우리가 만들어야 전깃불을 켤 수가 있듯이, 본래 가설은 돼 있지마는 끌어다 켤 수 있고 용도에 따라서 쓸 수 있는 그런 전력이라야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절대 믿지 않는 겁니다.
기복으로 관습이 돼서 그런지 아주 습이 배서 그런지 물질세계에 그냥 배어서 그런지 하여튼 관습에 매달리고 습성에 매달리고 욕심에 매달리고 자기 착에 매달리고 ‘나’라는 착에 끄달리고 삽니다.
‘나’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한 몸뚱이 속에 자기가 얼마나 많은데 자기 하나를 자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했습니다. 안과 밖이 다 공했습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쉬는 게 하나도 없고 끊어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밤에 자면서 숨을 쉬지요? 숨을 쉬는데도 그것도 바로 작용이자 움죽거림입니다. 이 모두가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믿는 것을 진실로 믿지 못하고 알만 있는 줄 알고, 알하고 줄하고 갈라지면 시체가 돼서 없어지고 줄만 남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 있다면 염주 알과 줄이 같이 꿰어져 있는 것이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래 이 세상에 나온다면 염주가 돼서 나오는 겁니다. 염주가 됐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형성이 됐으니까요.
그러니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온 게 화두지 어디 또 화두가 따로 있으며, 자기가 있으니깐 상대가 있는 거고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 속에 자기가 있는 거지 어디 또 딴 데 있습니까? 자기를 끌고 다니고 자기를 형성시켰고, 과거에도 자기를 끌고 다니고 현실에도 자기를 끌고 다니는데, 염주 줄이 염주 알을 끌고 다니지 딴 게 있습니까?
그래 여러분은 염주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주 알은 염주 줄을 진짜로 믿어야 해요. 그것이 자기의 영혼의 뿌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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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시골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디다. “나는 다른 거 다 믿지 않고 내 주먹밖에 믿는 게 없다고요. 그런 말을 하시는 분 봤어요. 그게 바로 안과 밖이, 줄과 알이 똑같이 주먹에 쥐어졌다면은 아주 좋았을 것을, 안은 따로 있고 밖도 따로 있게 주먹을 쥐었으니깐 그게 좀 안됐죠. 그렇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걸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죠? 만물의 생명들과 물과 서로 먹고 서로 사는 거라고. 흙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고 공기도 그렇고 태양도 그렇고 모두가요. 우리 몸뚱이속의 생명들도 같이 공식하고 돌아가고 있죠. 그리고 이 세계가 다 공식하고 돌아가고 있죠. 가정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어느 종교단체도 그렇고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진짜로 믿으시려면 자기 안의 줄, 몸뚱이가 꿰어 있는 줄, 그 중심! 주장자를 딱 진짜로 믿고 ‘너만이 나를 이끌어갈 수 있어!’ 하세요. 사실이 아닙니까? 거짓말입니까? ‘너만이 염주 알을 굴리게 할 수 있어!' 이 소리죠. 줄이 끊어질 일도 없고요.
그러니 여러분이 심사숙고해서 생각을 깊이 하시도록 하시고, 부처님께서도 그러셨지만 고깃덩어리를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을 기르고 마음을 발전시켜서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라고 이끌어 주는 거지, 내 고깃덩어릴 믿거나 스님네들 고깃덩어릴 믿으라고 부처님 법을 이끌어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 마음으로 ‘주인공!’ 하면은 일체 삼천대천세계 일체제불의 마음까지도, 여기 앉은 스님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바로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마음으로 진짜로 믿고 밀고 나간다면은 모든 게 되는 건데, 그런 걸 못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고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밀고 나간다면 자꾸자꾸 자기의 마음이 발전이 되면서 어디에다 의지를 안 하고 의존을 안 하고 자기가 체험을 하면서 자꾸 돌아가는데, ‘스님을 만나봐야 되겠다.’ 요기에 또 착을 붙인다면은 스님을 꼭 만나봐야 되거든요. 그게 무슨 원인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마음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만큼 지원의 스님네들을 찾아서 묻고 또 자기의 어떠한 내력에 대해서 요건만 얘기해드리고 “그저 한마음 돼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그저 요점만 얘기하면 될 거를, 여기 먼데까지 오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왜냐하면은요, 이런 게 있죠. 어느 스님네한테 얘길 들으니까 학승한테는 학승 제자가 따라 붙고, 선승 뒤에는 선승으로서 제자가 모두 따라 붙고, 부전에게는 부전이 따라 붙는다고 했습니다. 즉 염불하는 스님네들은 염불하는 스님네들이, 은사가 염불하는 스님이면 염불하는 스님으로 하나가 돼버린다 그랬습니다. 우리 여기 스님네들 길고 짧은 게 없습니다. 모두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스님네들한테 지원에서 얘기를 잠시잠깐 해도 한 찰나에 둘이 아닌 까닭에 그건 똑같습니다. 이게 부처님 법입니다. 부처님 법이란 손으로 만져서 낫게 하는 것도 아니요, 말로 해서 잘 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보면 보는 대로에, 본원에서 가깝게 사는 사람은 본원으로 와야 되겠죠. 그러나 지원에 있는 분들은 지원의 스님네들이 계신데 어찌 이리로 찾아옵니까? 그 습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좀 강력하게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단단히 가지시고 기르십시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이거는 말로 다 못 하는 말입니다마는, 욕먹기 똑 참한 말이죠. 그러나 한마디 했으면 좋겠습니다. 만물만생이 버러지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남녀라고 그러죠. 남녀의 접근이 있음으로써 모든 게 이루어지고 탄생시키고 그런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저 아래 생물서부터 위까지 말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 아내를 두고 또 음욕을 탐해서 그러시는 분들이 있고 여자도 자기 남편을 두고도 음욕을 탐해서 그러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거를 알게 되면 여러분도 진저릴 칠겁니다. 그걸로 인해서 발목이 잡히고 발목이 잡힘으로써 차단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안의 세계로 넘어서질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뱅뱅뱅뱅 돌고 넘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계 중에 ‘음욕을 탐하지 말라.’ 했죠. 그것이 잠시잠깐 한 찰나의 잠깐인데도 불구하고 그 한 찰나가 얼마만큼 차단을 시키고 얼마만큼 고초에서 떠나지 못하게 창살 없는 감옥에다가 가두는 건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나고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겠습니까? 한 찰나 살고 갈 거를. 마음이 아름답고 행동이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족하지, 사람은 못나게만 태어나게 돼 있는 것도 아니고 잘나게만 태어나게 돼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아름다우면 요 다음 생에 아름답게 또 태어날 거고, 원수를 지으면 복수를 하고 이 야단들을 하니 말입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이 자기가 한 것대로 받으니 이 노릇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고만이지, 이렇게 된다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우리가 잠시잠깐 생각을 해보십시다. 오다가다 말고 남에게 따귀를 한 대 붙이고 발길로 차니까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야, 너 가만히 있는 사람 왜 때려?" 그러고 들이덤벼서 또 때린단 말입니다. 그거와 똑같습니다. 모르고 진 죄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고 알고 진 죄는 알고 받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로 간편하게 얘길 하니까 그렇지, 내가 말입니다. 한 십년 전 얘깁니다마는 이렇게 오고가다가 길을 걷다가 봤습니다. 풍뎅이든 개미든 온통 모두 남녀에 연연하고 그렇게 탐하고 돌아가는 거를 볼 때 ‘야, 참 이 세상 모두가 참 저게 도대체 뭐길래,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눈도 멀고 귀도 멀고 그냥 쫓아서 저렇게 해야만 되는 건 줄 알고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인간이 돼서도 왜 꼭 그래야만 산다는 겁니까? 내 마음으로써 벗어난다면 그렇게 안 하고도 정말 재미도 볼 수 있고 정말 자비를 느낄 수 있고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영원토록 내가 사랑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이렇게 자유자재권이 있는데도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 비밀을 모를 겁니다. 여러분은 정말 모를 겁니다. 자유스럽게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의 자비성 말입니다. 바로 광력의,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모두가 같이 그렇게 일분 일초도 틀리지 않게 사랑할 수 있고, 영원히 베풀 수 있고, 영원히 가질 수 있으며, 영원히 버릴 게 없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도량으로써, 우리의 삶으로써 생명도 둘이 아니게 모두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은 이렇게 듬금듬금 떠서 얘기했지만 오늘 한 말이 말을 떠나서 본다면 너무도 말로는 할 수 없는 도리가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만 그칠 테니까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질문자1: 스님의 덕 높으신 가르침으로 온 도량이 법열로 충만합니다. 마음 모아 삼배 올립니다. 행으로 옮길 내용으로 조상님들의 분묘에 관한 사항입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물자가 풍부해져서 요즘은 농촌에서도 땔감을 나무로 하지 않고 프로판가스 등으로 대치를 하다 보니 산에 풀을 베지 않아 성묘길이 온통 덤불 투성이로 변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벌초하기도 힘이 들고 해서 차제에 조상님들을 화장하여 금왕지원 영탑 공원에 모시고 싶은데 묘소를 잘못 손대면 큰 화를 당한다고 집안 어른들이 말리는 실정입니다. 실행해도 될지 바른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것도 관습입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을 잘 통해서 세상을 잘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거를 잘 파악해서 행하시도록 하셔야 될 겁니다. 예전에는 예전대로 그러한 시대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름도 달라졌고 땅덩어리도 좁아졌고,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그럼 차에다 싣고 금방 갈 거를 마차에다 싣고 가시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안 그럽니까?
그런 거와 같이 지금은 지금대로 생각이 달라져야죠. 내가 하고 싶으면 그대로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거니까 물 한 그릇 떠놓고 밝은 불, 향 켜놓고 삼배 올리고 주인공에다 맡기고 소(燒)해서 물이나 산에, 물에다가 끼얹어버리고 위패를 만들어 다라니에다가 싸서 탑에 올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가정에서 탑 하나만 하면 항상 되들어가고 되들어가고, 그렇게 하면 돈도 안 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고 이제는 자손들에게 산으로 산으로 찾아다니라고 하기에는 부모들이 너무도 염치없습니다. 자손들을 위해서도 그러고 시대에 따라서 사람이 사는 도리에 맞추어서 그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니 그런 관습 같은 데 얽매이지 마시고 마음먹은 대로 시대를 잘 봐서 돌아가는 대로 하십시오. 그게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니깐요.
질문자1: 한마음 공부를 한 도반들 중에는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공부를 시작한 후로 꿈 또는 직감 등을 통하여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고도 하고 그날의 닥칠 일들을 미리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도 합니다. 한마음 공부도 진도가 있는지요. 있다면 자신이 그 효과를 측정해갈 수가 있는 것인지요.
스님: 아, 안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났다고 얘기도 없었게요. 하하하. 아, 진도가 없으면 부처님이 어떻게 났겠소? 우리 육신이 태어났다면 육신이 태어난 거지 정신이 태어난 게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정신이 태어나라 하고 부처님이 이끌어준 거죠. 자기가 정신을 태어나게 했으니까. 부처님도 어디 공중에서 떨어진 분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신계를 다 파악해가지고 우리들을 이끌어주시려고 사십구 년 설한 거죠. 그러니까 왜, 아까도 얘기했지 않습니까? 생명이 생겨가지고 먹고 먹히면서 그 시련을 겪으면서 체험하고 경험해서 진화돼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왜 진도가 없습니까?
질문자1: 첨단과학이 발달한 요즘에도 현대의 의학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공부하다 보면 불가사의하게도 완쾌되는 도반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스님의 법력이라 막연히는 믿사오나 그 심오한 치료법의 비결은 무엇이온지 밝혀주실 수 있는지요. 아울러서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도반들이 병고에 시달림 없이 늘 함께 건강한 상태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스님의 법력으로 포용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스님: 허허허, 있죠. 그건 왜냐하면요, 내가 항시 여러분한테 얘기하죠. 나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니라고요. 단 하나 있다면 마음이 오고 가면서 둘이 아니게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지니까 불이 들어올 뿐이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낫게 했다 네가 낫게 했다 이런 게 없다고요. 없는 그 가운데 불만이 밝혀졌노라고요. 어때요. 여러분도 그렇게 하셔야만이 아주 돈독한 자아부처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질문자1: 아울러서 제 사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꽤 오랜 기간을 다리가 근육이 풀려 힘이 없어지는 그런 병을 6, 7년 앓은 걸로 압니다. 그런데 금년에 와서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양쪽 발 엄지발가락에 발톱이 나오기만 하면 바스러집니다. 이유를 몰랐죠. 지금도 불편은 합니다마는 어느 날 목욕탕을 가서 보았더니 발톱이 말짱하게 원형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는 발톱 양쪽이 전부 나와서 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징조인지요?
스님 : 하하하. (대중 웃음, 박수) 아, 그거야 물론이죠. 그거야 물론이고 말고요. 그래서요, 이 공부라는 게 너무도 좋아서 부처님이 여북하면 “세세생생에 내 몸뚱이 고깃덩어리가 없어도 너희가 있다면 내가 있는 것이니까 열심히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라.” 하고 가르쳤습니다. 이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이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데 마음은 선장이고 마음 내는 거는 제멋대로 내는 겁니다. 도둑질을 하려면 도둑질을 하고 사기질을 하려면 사기질을 하고 좋은 일을 하려면 좋은 일을 하고 마음 내는 거는 멋대로예요.
그런데 그 선장이 되는 마음이란 놈은 그 멋대로 내는 마음이 나쁘고 좋고 잘되고 못되고 하는 걸 아는 놈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놈이. 마음 내는 놈이 그렇게 마음대로 내니까 마음이란 놈이 선장이 돼야죠. 알고 있으니까. 그 마음이란 놈이 선장이 돼서 다스려라 이겁니다. 다스려 나가되 그 다스리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이것저것 내게 하는 것은 업식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 몸뚱이 속에 헤아릴 수 없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가지고 업식이 돼서 내 몸 안에 잔뜩 들어 있는 거죠. 들어 있으면서 이거 내보내고 저거 내보내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이렇게 만들거든요.
그런데 내 마음 근본 선장은 요놈이 나쁘게 생각을 하는지 좋게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스려서 되 돌려놔라 이런 겁니다. 되 돌려놔라 이런다면 어떻게 좋은 일이 생기느냐? 되돌려놓는다면 업식인 마음 의식에 통신이 돼가지고 ‘아, 이런 거로구나.’ 하고선 그 선장의 뜻에 다 따라주게 돼 있죠. 선장의 마음에 다 따라주게 돼 있으니까 모자라는 건 채우면서 작용을 자꾸 해가니까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죠.
예전에는 그런 일도 많이 있었어요. 소아마비에 걸려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또 뇌염환자가 많이 성행했을 때 그것을 가르쳐주었더니 그대로 공부해서 가는 다리가 제대로 되고 지금 성장해서 아주 모 회사의…,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 다니고 잘 사니 나 좋고 그 사람 좋고, 세세생생에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거를 본보기로 하고 마음을 발전시켜서 자기라는 놈이 그렇게 선장으로 있다는 것도 알았고, 선장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자생중생들이 다 따라준다는 것도 알았고, 따라서 행해준다는 것도 알았으니 점차적으로 가다보면 자생중생들한테 항복을 받는 거죠. 항복을 받는다는 그 말 자체가 말일 뿐이지 바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죠. 하나가 돼서 없어지니까 이거는 항복을 다 받았느니라, 이러는 거거든요. 나중에는 항복받았기 때문에 항복받은 것도 없고 안 받은 것도 없느니라. 그대로 여여하니라 이겁니다.
그러니 빨리빨리 안 되는 사람은 ‘저렇게 빨리 되는 사람은 빨리 되는데 난 왜 이렇게 빨리 안 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공부를 빨리빨리 해야 할 텐데 하는 것도 그냥 놓고 가십시오. 공부를 하다 보면 빛도 보일 수가 있고, 어떤 땐 어떤 소리가 들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도 있고 이런 경계가 다가옵니다. 그럴 때 ‘아, 나를 이렇게 이끌어주고 공부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보이고 들리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되돌려놔야 합니다.
오신통도 벗어놔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게 (법상 위의 물컵을 가리키시며) 오신통이라면은 이 바깥으로 벗어나야 이거를 마음대로 이렇게 굴리고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지 이 안에 들어가서는 이 물 컵을 굴릴 수가 없죠? 오신통이라는 것이 내 모든 법 테두리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차안 속입니다. 그래 차안을 벗어나서 피안의 세계로 벗어나야 이거를 굴리죠. 이 통을 굴린단 말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굴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이것이 따지고 보면 엄청난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시작도 해볼 수 없는 공부입니다. 머리 깎고 승려가 되야만이 이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설해주실 때 유마힐 거사나 부처님이나 다 같은 한 도량 안에서 모두 구속되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이끌어갔던 그 뜻을 알 겁니다. 여러분한테 말없이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유마힐거사도 그렇게 이 세상에 났던 겁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가 낫는다는 말을, 중생들을 다 낫게 해야 내가 낫는다는 소리로 착각을 하고 모두 계신데 내 몸속의 중생들이, 생명들이 건장해야 내 몸뚱이가 건장하지 않겠습니까?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벽을 치면 친 대로 그것만 보니 늘어가겠습니까, 어디?
질문자1: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하여튼 제가 외려 감사합니다. 될 수 있으면 그저 튼튼한 다리가 되셔서 이 세상을 활보하신다면 더욱 더더욱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