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23. 고려시대 11
<한국>
고려시대
1331 근시 다방원 모두 회복
@ 다고(茶鼓)ㆍ다당(茶堂) ①
1333 한수의 출생 ②
1337 정몽주의 출생 ③
@ 각 지방에 다원이 있었음 ④
1340 최해의 죽음 ⑤
1343 이조년의 죽음
1345 <식화지(食貨志)>에 다법에 관한 것이 나옴
1347 지방전로 정비
1349 이숭인의 출생 ⑥
1352 이행의 출생 ⑦
이연종의 죽음 ⑧
<중국>
원대
1336 고계 ⑨
1343 송ㆍ요ㆍ금의 <삼사(三史)> 편찬
1348 우집의 죽음 ⑩
@ 송현희의 활동 ⑪
<일본>
남북조
1331 차에 관한 편지 ⑫
1334 <이조하원낙서(二條河原洛書)> ⑬
1336 내기투다 금지(족리존씨)
1338 실정막부설치
1342 오산십찰(五山十刹) 설치
1351 다회의 그림
이 시기는 고려의 차가 제일 번성해서 궁중에 다방원(茶房院)이 있었고 왕공과 비빈은 물론 공주까지 사찰에서 차를 마셨다. 사찰에도 다당(茶堂)과 다고(茶鼓)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백장청규>가 다시 간행되어 차를 통해 사내(寺內)의 규율과 수칙을 다스리려 한 결과라 하겠다. 또한 각 지방에도 다원을 두었다. 이런 여건 아래서 정몽주, 최해, 이숭인, 이해 이연종 등의 선비 차인들이 속출하여 차문화를 높은 경지로 발전시켰다.
중국은 원대에 들면서 북방의 몽골족이 다스리게 되었으나, 차의 생산지는 모두 한족이 살고 있는 남쪽이었다. 그러니 자연 그들의 고매한 차의 정신을 이어받기 힘들게 되니 차문화는 조금 후퇴하게 됐다.
개별적으로는 차인들이 많았으나 송대와 같은 명저나 명인들은 드물었다. 한편 일본은 계속 차문화 정착에 힘쓰고 발전하는 시기였다.
① 다고와 다당: 사찰이 금당(金堂) 주변에 다당을 따로 세우고, 법고와 다고를 각각 두었던 것은 헌다나 다례 그리고 선행(禪行)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② 한수(1333~1384): 고려 말 문신으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진 차인이다. 엄광대사에게 보낸 다시(茶詩) 등이 <유항집>에 전한다.
③ 정몽주(1337~1392): 여말 충신으로 호는 포은. 차를 즐겨 ‘석정전다(石鼎煎茶)’ 등의 다시를 썼다.
④ 지방 다원은 주로 왕실 사람이나 관리들이 이용한 것으로, 조선조의 객사(客舍)니 객관 같은 역할을 했다.
⑤ 최해(1287~1340): 최치원의 후손으로 강직한 성품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다공(茶供)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⑥ 이숭인(1349~1392): 문인으로 호는 도은(陶隱). 다객으로 많은 다시를 남겼는데 특히 ‘가명사가인(佳茗似佳人)’의 대목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⑦ 이행(1352~1432): 호는 기우자(騎牛子). 품수에 능해서 두 가지 물로 차를 끓인 것을 알아낼 정도였다. 찻물로 충주의 달천수, 한강의 우중수, 삼타수 등을 꼽았다.
⑧ 이연종(1270~1352): 이승휴의 아들이며 박치암에게 보낸 다시가 유명하다.
⑨ 고계(1336~1374): 명대 시인으로 차를 즐겨 ‘채다사(採茶詞)’를 썼고 그의 다시 ‘과산가(過山家)’가 애송된다.
⑩ 우집(1272~1348): 원대 문인으로 ‘유용정(游龍井)’이라는 글에서 용정차의 생산과 채다시기, 품질 등을 논했다.
⑪ 송현희(1312~?): 명대 학자로 맑고 아름다운 다시를 남겼다. ‘방외(方外)의 친구가 보낸 돌솥에 답하는 시’가 많이 알려져 있다.
⑫ 금못정현(金澤貞顯)이 아들 정장에게 보낸 편지에 ‘앞으로 차가 크게 성할테니 부족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햇차를 보내라’고 했다.
⑬ <이조하원낙서>에 투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