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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아저씨께.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미진이에요. 해마다 겨울이면 이렇게 된장 한통씩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사무소나 복지관에서도 김치가 나오긴 하지만 아저씨가 보내준 된장하고 장아찌가 제일 맛나요. 동생 우철이는 매일 아저씨가 보내 주신 장아찌하고만 밥 먹어요….”,
“이 거사 보세요. 해마다 이역만리 우즈베키스탄까지 고국의 된장이며 고추장을 보내주시니 이 은혜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초등학교 6학년 미진이가 또박또박 정성껏 눌러쓴 감사의 편지, 일제치하 당시 징용에 끌려가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정형진(85) 할아버지가 보내 온 눈물 젖은 감사의 편지. 누구에게 보내온 편지일까. 바로 소외받고 형편이 어려운 우리이웃들에게 ‘정성과 사랑’이라는 양념으로 된장을 담궈 보시하는 된장장수 이정임씨(52)에게 보내온 편지들이다.
매일 장독에 담긴 된장을 푸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오른손은 장독이 올라 울긋불긋 만성피부염이 생겼지만 “된장 잘 먹었다”는 감사의 편지 한통에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삶의 보람을 찾는다는 이씨. 그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에서 된장을 판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된장만 파는 된장장수가 아니다. 전국의 인연 닿는 사찰 50여 곳과 1000여 명의 소년소녀가장, 충북지역의 고아원, 양로원, 복지원, 성당, 교회 등 30여 곳에 된장을 보시하는 ‘사랑의 된장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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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다. 절에 공양물로 올라온 콩은 스님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메주나 청국장으로 만들어 준다. 이렇게 9년 동안 된장을 보시하다 보니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도 많다. 절에 가면 ‘된장 거사’,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된장 천사’로 통한다. 1년이면 어림잡아 2천명에게 보시할 된장과 하루에도 수 십 명의 손님들이 먹을 된장을 공급하다 보니 된장독만 약 3천 개가 넘고 1년 동안 보시한 된장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7천 만 원이 훌쩍 넘는다.
“아무 반찬이 없더라도 된장찌개 하나에 밥 한 그릇이면 그럭저럭 허기는 채울 수 있잖아요. 한참 클 나이인 소년소녀가장들에게 햄이며 고기며 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양껏 챙겨주고 싶지만 그렇게 못하는 게 미안할 뿐입니다.”
이정임씨는 원래 된장장수가 아니었다. 1988년까지만 해도 속칭 인천에서 잘 나가는 유통업 사장님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동종업계에 종사하던 친구에게 보증 서 준 것이 화근이었다. 보증을 선 친구 회사의 부도로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어음결제 압박과 은행에서의 차압은 결국 그를 도산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우선 깡패까지 동원한 빚쟁이들 때문에 아내 최연식씨(47)와 아들 호경이(6)를 데리고 조치원으로 몸을 피했다. 주머니 속엔 꼬깃꼬깃해진 만원 권 몇 장뿐. 그 돈으론 1월의 칼바람을 피할 여관방 하나 못 잡을 형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과수원과 논농사일을 나가며 날품을 팔아 1년에 20만원 하는 방 한 칸 짜리 집을 겨우 얻었다. 슬래이트 지붕이라 여름엔 새벽 3시까지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잠을 설쳐야 했고 겨울엔 온 가족이 이불 속에서 입김을 불며 오들오들 추위에 떨어야 했다. 모기에 뜯기고 땀띠 때문에 온몸에 수포가 잡힌 아들 호경이와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햇볕에 시커멓게 그을린 아내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뭘까?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불연듯 지난날 안산 화림선원 주지 스님에게 배웠던 죽염을 넣은 된장이 생각나지 뭡니까.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 날로 온 가족이 충북으로 내려와 청주 월명사 주변 공터에서 된장 담그는 일을 시작했죠. 불평이나 원망한번 없이 언제나 제가하는 일을 응원해준 아내의 내조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됐지요.”
노력을 거듭한 끝에 ‘된장 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된장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살맛이 났다. 예전엔 그렇게 새벽이 오는 게 싫었는데 이제는 빨리 새벽이 와서 된장을 팔았으면 하는 즐거운 욕심도 생겼다. 이런 행복도 잠시. 1992년 여름 내내 계속되는 장마로 인한 산사태는 3백여 개의 장독을 모조리 삼켜버린 것이다. 두 번째 맛보는 좌절과 실패였다. 흙더미에 덮힌 깨진 된장독을 끌어안고 3일 밤낮을 울었다.
“된장은 살균효과가 있어 피부에 닿으면 장독이 오를 정도로 독하죠. 그런데 깨진 된장독 안에서 하얗게 살이 오른 구더기 몇 마리가 꿈틀대며 살아 있지 뭡니까. 너희들은 이 독한 된장을 먹으며 살아가는데 나는 달콤한 설탕과 꿀만을 먹으며 세상 살기를 바랬구나. 이런 마음이 들자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투지가 불끈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구더기가 제 인생의 스승이었던 셈이죠. 허허허”
1997년도에 그간 저축했던 돈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땅을 샀다. 그런데 그 해 겨울 IMF가 터지면서부터 귀농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의 된장은 일약 ‘웰빙된장’, ‘성공을 부르는 된장’ 등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1999년도에는 신지식인으로 뽑혀 교도소, 복지관, 관공서 등에서 강연요청을 받은 것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얼마의 강연료가 나오지만 괴산에서 서울을 오가는 차비하기에도 모자라 오히려 자신의 돈을 보태가며 강연을 다녔을 정도다.
“절에서 된장 만드는 법을 배웠지만 이제는 되려 절에서 된장 만드는 법을 배우러 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모두 제가 만든 된장을 사주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인데 이제 좀 살만하다고 해서 가난했을 때, 못 살았을 때, 배고팠을 때를 잊고 혼자만 잘살면 안되죠. 당연히 베풀고 나누며 살아 야죠.”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된장을 나누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까웠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98년부터 시작한 ‘사랑의 장 담그기 교실’이었다. 11월 첫째일요일과 2월 마지막 일요일 1년에 두 번하는 행사지만 이씨의 장맛이 맛있다는 소문이 얼마나 파다했으면 한번 행사를 열 때마다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이씨는 피곤하거나 싫은 내색 없이 그의 트래이드 마크인 웃음으로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치고 점심이며 저녁까지 대접해 가며 열과 성을 다한다. 1997년부터 괴산군 청안리에서 된장을 팔았던 이씨. 그는 일을 시작하기 전 매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108배와 참선수행으로 아침을 맞는다. 돈벌이를 위한 된장 팔기가 아닌 그야말로 구수한 사람냄새 나는 된장을 전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마음처럼 간사한 게 또 있겠습니까. 돈 때문에 생기는 탐진치를 염불과 108배로 훌훌 털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제가 만든 된장 속에 웃음과 행복과 건강을 담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했는지 장남 호경이(23)와 쌍둥이 상준(14)이 경준도 이일을 이어 받길 원하고 있고요.”
이제 내년이면 그가 된장을 팔고 있는 괴산군 청안면 운곡리 마을 한켠에 ‘온 사람의 선방(가칭)’이 완공된다. 누구든지 와서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리 머지 않은 4~5년 후엔 고아원도 준공될 예정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시설과 최대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내 집처럼 최고로 편안하게 느끼고 뛰놀 수 있는 고아원을 만드는 것이 그의 최대 숙원사업이다. 진흙 속에서도 향기로운 연꽃은 피어나듯이 오늘도 그의 된장은 사람냄새 구수하게 풍기며 그렇게 익어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