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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가 주최한 이번 특강에는 전국에서 150여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그 열기에 부응하듯 팔순을 넘긴, 문화재보존학계의 태두 이 박사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열띤 강의로 수강생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 박사의 강연 주제는 ‘자연환경을 활용한 제습(除濕)의 지혜와 문화재 보존문제’. 이 박사는 공주 송산리 6호 고분과 석굴암,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에 녹아 있는, 조상의 자연환경을 활용하는 지혜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이 박사는 화학도로서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을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1956년 방문한 송산리 6호 고분. 지하구조물이고 다습한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바닥면을 포함한 벽, 천정의 벽돌 표면 전체가 완전한 건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놀라고 말았다.
순간 발견한 것이 연도 중앙부를 통해 뻗쳐 있는 배수로였는데, 건조한 벽면과 달리 벽돌로 만들어진 배수로는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벽면의 벽돌이 겹으로 쌓여서 사이에 공기층을 형성해 보온 효과를 내 온도가 높은 반면, 바닥에 접해있던 배수로 표면은 낮은 온도를 유지해 냉각판 구실을 함으로써 수증기를 응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기온이 내려가는 밤에는 배수로 벽돌 표면에 수증기가 응축하고, 기온이 오르는 낮에는 응축된 일부 수분이 증발됨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한 것이다. 이 일은 이 박사를 문화재보존과학의 길로 이끌었다.
이 박사는 석굴암에서도 자연제습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그는 석굴암 밑에 있는 두 개의 샘이 석굴암 바닥을 흐르면서 결로를 방지하는 기능을 했다는 주장을 폈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문화재를 보존하는 지혜에 대한 이 박사의 관심은 고려대장경 판전으로 이어졌다. 그는 경판을 온전하게 보존해온 판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1991년 센서를 직접 제작해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내부 여러 곳에 설치하고 미시기상환경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판전 내부 온도는 위층이 아래층보다 2~3도 높은 수직 분포를 보이나, 수평분포는 비교적 균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부 습도는 옥외에 비해 변화가 완만하며 공간 내에서 거의 동일했고, 판가 위 경판 사이의 온도변화는 공간에서보다 느리고 작았다. 이로 인해 목제품 열화 원인인 수분 응축을 줄여 경판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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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아래가 트여있는 틈새상자는 판전 내 대기의 대류를 원활하게 한다. 맑거나 건조한 날의 경우 틈새로 상승대류가 형성돼 경판의 수분이 감소하고 틈새 습도는 높아지는 반면, 기화과정에서 틈새 기온은 내려간다. 반면 습한 날은 습한 공기가 경판을 지나며 습기를 빼앗기게 되고, 이 같은 액화과정에서 틈새 공기는 기온은 올라간다. 이 박사의 이 같은 설명은 온도와 습도, 상대습도를 측정한 결과와 일치했다.
50여년의 연구 인생에 화두로 지녀왔던 문화재보존의 지혜를 풀어내기에 100분이라는 강연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지 이 박사는 문화재 보존철학을 피력하는 것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문화재란 조상의 얼과 교신할 수 있는 타임머신입니다. 보존·복원 작업은 언제나 가역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재의 최종 상속자가 아니라 과도적 관리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