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대안이 왜 선(禪)이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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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과학이니, 수학이니 영어니 해서 지식도 천배 만배는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도 더 많아지고 엄청난 지식도 쌓았는데 우리가 지금 행복한지 돌아봅시다. 내가 본래 성불인 부처로서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와 같이 일어나고 저녁에도 부처와 같이 잠을 자고 한 발짝 한 찰나에도 당당한 부처로서 사는 삶이요, 행복한 평화로움을 느껴보는가 말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오히려 중노동 속에서도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저녁을 먹으면서 행복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아마 “정말 나는 행복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말 살만하다”하는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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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우리나라 인사법을 한번 비교해 보면 그 원인을 분석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했어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살 때는 동네 어르신들이 혹시 굶지나 않았는가, 아침은 정말 드셨는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 주는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21세기에 와서 우리 인사법을 들어보면, “부자되십시오”라고 합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돈을 많이 번 사람이 형제간에 화목하고 집안이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 형제간의 화목함이 더 적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자되세요”라는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와 남이 경쟁하는 회사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지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세계관이 잘못됐고, 이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는 대안인 선에서는 어떻게 보는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나는 주관이고 보이는 대상은 객관이다 하여 나와 남을 항상 둘로 나누어서 봅니다. 나와 남을 적이냐 동지냐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 그 원인을 한번 분석해 보자는 말입니다.
부처님법은 중도, 마하반야바라밀,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고 남이 소중하면 내가 소중하며, 이웃이 잘되어야 공장이 돌아가고 농장에서는 곡식이 지어져서 이웃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이러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서양철학에서는 사유하는 이성과 그 사유하는 이성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대상, 즉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는 이원론을 원칙으로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21세기 위기가 오지 않았을 텐데, 사유하는 정신은 우월하고 그 대상인 물질은 내가 마음대로 움직여야 된다는 하인주의 지배의식, 개발의식이 이원론에서는 싹트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개발논리와 지배의식이 싹트다 보니 환경까지도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가 21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환경오염입니다. 공기만 하더라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좋은 공기를 찾아서 돌아다녀야 할 지경이 됐습니다. 공기 하나를 마신다 하더라도 내가 잘나서 내 코로 공기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저 많고 많은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가 밤새 공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계관을 우리는 연기법, 중도법이라 하는데, 지금 21세기에 여러분들은 나와 우주자연,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계관을 반드시 설정해야만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결국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이원론의 폐단을 지적한 아이슈타인 박사는 마음수행이 앞서가고 과학이 뒤를 따라와야만 과학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마음수행은 안하고 과학만 발달하면 과학은 핵무기가 되고 수류탄이 되고 미사일이 되어서 인류를 멸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박사는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내가 내 자신을 깨다는, 내 마음의 별자리를 찾아가는 수행자가 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미 그 자리에 들어서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각 가정에서 돈 돈, 지식 지식 하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확인도 안 해본 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질주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번 범어사 설선대법회가 끝나고 나면 가족회의를 해서, 각 가정의 방향전환을 한 번 해 보세요. 우리가 정말 행복한가,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앉아서 서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반성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점을 지우고 마음농사를 지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해 보란 말입니다. 각 가정마다 세계관을 새롭게 설정하고 방향설정을 제대로 할 때 연기법을 바로 보게 되고, 그 가치관이 중도법을 향할 때 인류는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세계 인구 가운데 내가 나를 깨달아야 된다는 이 참선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만큼 앞서가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나를 깨닫겠다”고 이런 자리에 참석해서 참선법을 배우는 사람은 대단한 복인(福人)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 와서 우주대자연의 이치를 홀연히 깨달으시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부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전부다 본래성불이라 부처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건만, 다만 눈에 가리는 번뇌 망상에 의한 잘못된 착각 때문에 부처인 줄 모르는구나”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 태양광명은 오늘도 이 도량을 비추고 있지만 문을 닫고 커튼을 쳐 버리면 빛이 들어올 수 없듯이 번뇌 망상이라는 커튼을 탁 쳐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벽만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꿈을 깨면, 부처 아닌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야 말로 바로 인류 최초의 평등선언이고 최초의 민주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 면목이라고 이름 하는 것은, 보려고 딱 한 생각을 내어버리거나 찾으려고 하면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버립니다. 여러분, 눈을 가지고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눈은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에 그냥 봐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가지고 눈을 보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보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 이미 그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아무리 귀한 7대 8대 독자라도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해 밥을 먹어줄 수 없습니다. 먹어줘 봐야 아들은 배부르지 않습니다. 결국 인생의 근본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자세로 다음 생 혹은 몇 백 생 이후에라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인간 몸 받아서, 그것도 부처님법 따르는 불제자 되어 참선법 믿는 이때 안하고서는 다시는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서 내일로도 넘기지 말고 바로 오늘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자, 세계관이 잘못돼 가지고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진 것이 21세기 위기를 가져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내 자손들에게 이것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관도 객관도 없는 그 자리가 화두이니,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지는 화두를 벗삼을 수 있는 이 복은 천하의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러기에 참구하고 참구해야 합니다. 마음길이 뚝 끊어졌다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모든 지식이 모르는 것으로 들어가니, 즉 화두가 돼 버린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문득 타파하면 성불한지 이미 오래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 먼 장님이 눈을 뜨고 보니 허공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말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정말 여러분들이 믿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것뿐, 부디 영겁에 물러나지만 않으면 부처 못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가지 더 큰 복이라면 우리 불자들은 내생을 믿기 때문에 금생에 못한 것은 다음 생에 또 다음 생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내가 옷만 갈아입는 것이니, 즉 영원성을 보장하는 것이니 내생을 말하는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긍지를 가질 만 하다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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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오늘 법회에 동참한 불자들 가정 가정마다 세계관이 바뀌고 잘못된 세계관이 바로 정립되고 정견이 서게 된다는 얘깁니다. 21세기의 대안을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 마음문명에서 찾아보자는 부탁을 하며 오늘 법문을 끝내겠습니다.
■ 혜국(慧國) 스님은
-1947년 제주도 生
-61년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범어사에서 혜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대승사, 봉암사, 칠불사 등에서 정진
-69년 해인사에서 10만배 정진을 마친 뒤 팔만대장경각에서 오른손 세 손가락을 연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 동안 생식 하며 장좌불와(長坐不臥)
-제주도 남국선원에 무문관(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는 선방) 개설
-현재 조계종 선원장회의 회장
-현재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질의 응답】
<설우 스님>
해인사, 불국사, 범어사 등에서 25안거 성만
현재 조계종 승가고시 위원
조계종 승가교육 개선 추진위원회 위원
법인정사 선원장
설우 스님: 선종의 실천수행법이라고 하면 저는 간화선이라고 단언합니다. 천년이 넘도록 간화선이 선종의 정통 수행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조사선 정신을 바탕으로 해왔기 때문입니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비록 그 이름은 다르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동일한 구도를 지니고 있는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즘 학자들 중 조사선과 간화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간화선과 조사선 수행의 동일성에 대해, 그리고 조사선과 간화성이 주장하는 본래성불의 본질에 대해서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십시오.
혜국 스님: 참선하는데 있어서 조사선이나 간화선만 있는 것만 아니라 범부선 소승선 외도선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호흡이라든지 건강을 위한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조계종에서 말하는 선은 조사선과 간화선입니다.
그렇다면 뭘 조사라 합니까? 수십 대를 전해내려 와서 도를 깨쳐서 부처와 같이 된 분들을 조사라 하고 그 분들이 참선을 통해 깨달은 것을 조사선이라 합니다. 달정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무(無)”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깨쳐버렸단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깨치는 것을 우리는 조사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조사들의 말만 흉내를 내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시험 문제를 내서 분명히 깨달았는지 인정을 해주자는 것이지요. ‘무’라는 관문을 세워, 그것을 화두라고 해요. 글자 자체가 화두가 아니고 그 ‘무’라고 한 소식 자체가 화두란 말이에요.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그러니 조사선과 간화선은 조금도 차이가 없고 꼭 같은 방법이고 체제가 같아요. 둘은 깨닫는 방법이나 깨닫는 목적지나 수행하는 방법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설우 스님: 흔히 독서삼매니 영화삼매니 해서 눈앞의 경계와 하나가 될 때를 삼매(三昧)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삼매와 간화선에서 강조하는 궁극적인 삼매와는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십시오.
혜국 스님: 삼매란 말씀들 많이 써보셨지요? 간화선의 삼매는 일반적인 삼매와는 차원부터 다릅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삼매는 대상을 놓고 오히려 주관이 대상에 빠진 것을 삼매라고 하는데, 그것은 간화선에서 말하는 사실상의 삼매가 아니고 이름이 그저 삼매일 뿐입니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삼매는 내가 없어져 버려서 진리 자체가 되어 버린 상태를 화두삼매라 한다 이렇게 정의하겠습니다.
설우 스님: 간화선 수행을 하는 후학과 재가자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정견을 챙겨주셨으면 합니다.
혜국 스님: 그 나라의 운명과 종교의 운명은 같은 길을 걷게 돼 있습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할 정도로 탄압을 받아 이제 거의 유명무실해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반대로, 일부 임제종인가 조동종인가를 빼놓고는 화두를 수학공식 풀듯이 하나 풀고 나서 또 하나 풀고 하는-흔히 선원장 스님들은 그걸 ‘사다리 참선’이라고 말하는데-그런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간화선맥이 너무나 잘 내려오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데’로 가야 인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면 화두 참선법은 세계 석학들이 가장 부러워할 수행법이 될 것이고, 여러분들은 그 길을 앞서가는 분들이 될 것입니다.
<김건웅 거사>
부산대학교 공학과 졸업, 동 대학 경영학 석사 수료
금정불교대학 졸업
통도사 부산포교원 국제포교부장 역임
조계종 포교원 포교대상원력상 수상
현재 해인실업 대표
한나래문화재단 상임이사
김건웅 거사: 부처님께서 깨치신 내용 중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 있다는 연기법과 시공의 초월하는 절대 자리인 참나와는 그 뜻이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상대성을 말씀하시는 연기법의 세계와 절대적 당처를 말씀하시는 조사의 깨치신 내용과는 어찌 보면 상호모순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이 바르게 아는 것인지 깨우쳐 주십시오.
혜국 스님: “연기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법을 본다”하는 부처님 가르침은 이 시계를 보고 얘기하겠습니다. 만약 시계를 드라이버로 다 풀어 놓으면 그게 시계입니까, 고철덩어리입니까? 고철덩어리죠. 그럼 시계라고 하는 것은 이 판과 이 기계가 서로 물고 물려서 인연을 만들었을 때만 시계라는 세계가 창조됐습니다. 사과나무를 하나 보더라도 흙과 물과 따뜻한 태양과 바람, 공기, 사람의 노력 등 이 모든 것이 모여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 중에 하나만 없어도 사과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는 시간과 공간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변해가는 과정이고 모양이 있을 때만, 서로 의지해 있는 동안만 시계라 그러고 사과나무라고 하고 자동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그 변해나가는 과정, 즉 무아로서의 혜국이고 무아로서의 시계이기 때문에 그 움직여나가는 무아의 원리를 깨닫는 것을 바로 중도라고 합니다. 고로 어떤 업에 의해서 내가 움직여 가는지를 봐야하고, 무아로서의 연기법을 바로 보면 조사스님들이 보라고 한 바로 그 자리가 보일 것입니다. 연기법은 중도요 중도는 바로 부처님이 말한 화두라고 정리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김건웅 거사: 수행과 포교는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수행하는 스님은 수행에만 전념하시는 것 같고 포교의 일선에 계시는 스님께서는 수행과 거리가 먼 일상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다운 모습입니까?
혜국 스님: 요즘 선원장 스님들이 모이면 ‘삶과 수행을 어떻게 연결한 것인가’를 주제로 얘기 합니다.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내가 모자라기 때문에 수행 쪽으로만 치중하고 있다고 봅니다. 내가 출중하지 못해서 수행과 삶을 곁들이지 못해서 그렇지, 수행하는 삶 자체가 포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단 한 가지 내가 요구하고 싶은 것은 포교라고 하는 것이 꼭 말로 해야 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 수행하는 삶을 보면서 참다운 신심을 내는 것도 포교요 수행하는 삶의 뜨거운 눈물을 느끼면서 나도 한번 수행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왜 포교가 아니냔 말이죠.
저도 수행이 포교요 포교가 수행이 되는,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된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을 세웁니다. 지금 수행과 삶이 이분(二分)되어 보이는 것은 수행자들이 고쳐야 할 숙제입니다. 포교만 하는 분들도 반드시 수행을 곁들여서 삶과 수행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적을 받는 것은 우리가 역량이 모자라고 덕화가 모자라서 그렇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김건웅 거사: <선가귀감>에 이르기를 참선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 기묘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대신심(大信心), 둘째는 대분심(大忿心),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인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리면 마침내 그릇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심은 있으나 분심이나 의정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일러 주십시오.
혜국 스님: 제 자신이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십시오. 우리가 신심이라고 하면,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고 하는 수행과 내가 부처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수행과의 차이를 알아야 그 신(信)은 확립이 됩니다. 내가 이미 부처라고 하는 것은 새로 만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눈만 뜨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처다”라는 믿음이 확실하게 서서 천생 만생이 가도 내가 내 부처를 깨닫고야 말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신(信)이라고 합니다. 이 신만 확실히 서면, “그럼 왜 나는 부처가 안 된단 말인가?”하는 분심(忿心)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요즘은 “나는 부처다” 하고 나서는, 연속극이나 보고 놀러나 다니고 있으니 분심이 날 수가 있나요. 신이 딱 서면 의심과 분심은 안 날래야 안날 수가 없어요. “부처님, 조사스님들도 나같이 방황하다가 법문을 듣고 깨달았는데, 나도 오늘부터 기필코 화두라고 하는 신, 화두라고 하는 참나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바로 분심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라. 텔레비전 보고, 남하고 싸움하고 하는 것은 푹 익었으니 그건 설도록 하고 즉 그런 시간을 줄여나가고, 앉아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참구하는 것은 설기 때문에 푹 익게 해야 합니다. 선 것을 익게 하는 것은 노력 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은 참선을 부업으로 생각하지 말고 단 5분, 단 1시간을 하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전업으로 하란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분통이 터지고 부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고불고 하는 시간이 늘다 보면 의심이나 분심이 안 날 수가 없어요.
신심과 분심과 의심을 하나로 봐서 확철대오한다면 언젠가 부처님 영산회상에서 만나서 “너희들 모두가 부처라는 그 한마디 듣고 깨달아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부처님은 조금 쉬고 계십시오. 저희가 제도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날이 올 것입니다. “부처님 무엇을 해 주십시오” 하지 말고 “내가 부처님을 위해 뭘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경지까지 올라가 보자 이 말입니다. 정리= 여수령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법회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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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법회는 영하 6~7도의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3월 5일 열린 입제법회 때 보다 천여 명이 더 많은 4000여 명의 불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됐다. 행사 시작 3시간 전인 오전 11시부터 보제루는 발 디딜 틈 없이 불자들로 가득 찼다. 법회 후 이어진 참선실수도 지난 1회때 보다 참가자가 늘어, 보제루와 설법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 질의응답 사회, 화랑 스님이 맡아
지난 입제 법회 때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이 ‘질의응답’ 사회를 맡은데 이어 이번 법회부터는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화랑 스님(사진)이 법회 사회를 맡았다. 화랑 스님은 앞으로 8번에 걸친 법회의 사회를 맡는 한편 3월 19일 열릴 세 번째 법회에서는 고우 스님 법문에 대한 질의법사로도 나선다.
□ 혜국 스님의 참가자 위한 축원
혜국 스님은 법회 마다 참가 대중을 위한 축원을 하는 것으로도유명하다. 이번 설선대법회에서도 스님은 “오늘 모인 대중들이 잠깐 빌려 쓰는 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해 욕망을 따라 다니느라 생사윤회를 하옵는 바, 이제 설선대법회에서 보리심을 발하여 세세생생 날 적마다 발심출가하고 정견을 확립해 선지식을 친견하고 필경 성불하여 지이다”고 축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