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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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만나거든 이름을 베고"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강의]



"내 불성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다오"


붓다뉴스에 어느 분이, 제가 “불교학자나 철학자라기보다 에세이스트같다”라고 평을 해 주셨습니다.

제 글이 여느 불교학자들이나 철학자들과 달리-미안합니다-딱딱하거나 고답적이지 않고, 문학적 향취가 있다는 것을 짚어준 것 같아, 으쓱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물어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세 ‘이름’들은 서로 다른 이름들인가요. 가령 에세이스트라면 불교학자나 철학자일 수 없고, 불교학자는 또 철학자와는 다른 방에 거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옛적에 쓴 책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를 두고, 어느 신문에서 서평을 쓰면서 ‘한문학자’라고 규정하는 바람에, “아차, 한문학 하시는 분들이 한 소리들 하시겠군”이라고 뜨끔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도, 불교학자, 한문학자, 에세이스트

저는 이 모두의 이름에 걸쳐 있지만, 어느 하나도 꼭 집어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의 철학과를 나왔으니 ‘철학도’일 것이나, 불교를 공부했으니 ‘불교학자’가 아니라고도 못하겠고, 글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으니 ‘문학도’는 낯간지럽지만, ‘문학적’이나 ‘에세이스트’의 이름을 쓴다 해도 큰 죄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살아있는 저를 감당하기는 태부족일 것입니다.

‘이름’에 너무 고집하거나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어떤 특성들을 거칠게, 그리고 임시적으로 보여줄 뿐, 그 안에 무슨 고유한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규정하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름들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또 어떤 측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끝끝내 여러분 자신들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이름은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드러난 이미지(相)입니다. 사람들은 그 방식이 사물의 자체적 ‘성질’에 따른 것이기에 객관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객관적 ‘정보’이고 ‘지식’이라고 해도, 이름에는 또 다른 측면, 즉 제가 저번 강의에서 누누이 말한 대로, 사물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가치의식이 함께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말들은 객관적 정보는 없고, 감탄사나 욕처럼, 호오(好惡)와 편견만 들어 있기도 합니다.



이름의 두 얼굴, 정보와 선악

1) 정보로서의 말은 우리가 편의를 위해, 일정한 목적 아래서 소통하고 이용하고 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말과 이름을 떠나 살 수 없지요. 우리는 이것들을 태어나면서 배워 습득했고, 그 관행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 말과 이름들을 잘 습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열심히 이들을 공부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신문과 매스컴, 그리고 회사나 공장에서 이들을 습득하기 위해 그리 애쓰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말이, 이름이 자기를 표현하고 감정과 의지를 담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곳은 바로 이 이름과 말의 주관적 측면입니다. <금강경>이 전편을 통해, 이름을 썼다가 지우는 작업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말들은 좋아하고, 어떤 말들은 싫어합니다. 어떤 말은 더 좋아하고, 어떤 말들은 더 끔찍해합니다. 앞의 예를 들면, 저는 에세이스트보다 불교학자나 철학자라는 이름을 더 기뻐하거나,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쓴 분이나 저나 대체로 이 세 이름이 다 ‘있어 보여서’ 좋아할 것이라는 동의가 깔려 있지만, 가치 부여나 선호의 우선순위를 착각하면 불필요한 혼란이나 갈등이 오기도 합니다. 제 딴에는 칭찬한다고 했던 말이 영 아니었던 경우도 있고, 남은 경멸한다고 제게 던진 말이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름으로 하여 생기는 오해와 갈등은 심각한 바 있습니다. 상사와 동료 사이에서 싸움을 중재한 제 친구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어제 보니 꼭 토요토미 히데요시같더군!”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새기겠습니까. 당사자는 모욕적으로 들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그의 신발을 품에 안는 지극한 충성으로 신임을 받은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속상해하는 그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중재 능력과 리더십을 높이 산 것이야. 토요토미가 전국시대를 청산하고 천하를 통일한 위업에 빗대 그런 말을 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이름으로 상처주지 마십시오. 비난하려거든 솔직하게 하십시오. 악의를 숨기고 복선을 깔아 빗대 상처 주는 것은 비열한 짓입니다. 불교가 그래서 근본 계율로 불망어(不妄語), “남을 함부로 말로 헐뜯지 마라”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름으로 상처받지 마십시오. 칭찬은 무엇이고, 비난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이해관계와 호오에 따른 또 다른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칭찬과 비난은 자기 스스로에게 가해야 하는 것이지, 남의 입과 생각을 빌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 한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탄식을 기억합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스스로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존중하는 것일까.”

그러니 어떤 이름에도 기죽거나 슬퍼하지 말고, 떠 어떤 이름에도 잘난 척하거나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 이름들은 남들이 바깥에서 준 상표 혹은 딱지일 뿐, 여러분의 생명 자체에, 여러분의 불성 자체에 걸맞은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이나 그 불성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생명 혹은 불성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차이’를 구분하고, ‘특징’을 드러내자는 것인데, 각자의 적나라한 생명과 영원히 빛나는 불성에는 그런 거추장스럽고 칙칙한 징표들이 없습니다. 징표들이란 인간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편협한 잣대에 따라 붙여준 바깥의 물건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이름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수부티야, 내가 말하는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불법이라 한다.”

또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지워야 할 이름은 열등하고 사악한 것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있는 이름들일수록, 자신을 옭죄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교제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재산·지위·명예 등의 외면적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적 진리까지, 그것이 ‘이름’일 때는 결연히, 버려야만, 임제의 칼날처럼 “아버지를 베고 붓다와 조사를 베어야만‘, 여러분은 자신의 불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화엄(華嚴)의 그것들처럼, 여러분은 들판과 우주에 마음대로 피어있는 화려한, 이름없는, 들꽃들입니다. 여러분 각자들로 하여 우주는 빛과 생명을 얻으니 <금강경>은 이를 장엄불토(莊嚴佛土), 즉 “붓다의 나라를 치장하는” 보석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석입니다. 그래서 금강(金剛) 불성이라 하지 않습디까.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
2005-03-15 오전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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