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나갈 수 있는 방법은?
질문: 제가 작년부터 마음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해 나가다 보니까 어떤 자리없이, 우리가 지금 주인공에 대해서 분명히 생각이 안서더라도 그 자리를 믿고 놓으면서, 어떻게 보면 특별히 세우지 않고 놓은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오거든요. 그래서 주인공을 믿으면서 계속 한곳에 놓으면서 믿는 마음과 같이 어떻게 보면 의식을 모은다 할까요, 그렇게 모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지구도 우리 몸뚱이와 같아요. 지구도 중심이 있다구요. 중심이 있어서 쉬지 않고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어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듯이 사람도 역시 그렇게 돌아간다고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여기에 달린 바퀴가 있다고 봐요. 그러면 바퀴가 그냥 쉴새없이 돌아가도 중심은 끄떡없이 있어요. 바퀴만 돌아갈 뿐이에요. 바퀴가 돌아갈 뿐이라고요. 그래서 중심과 바퀴가 돌아가는 대로 그냥 거기다가 놔라 이거예요. 바퀴 돌아가는 거는 일체 쉬는 사이가 없이 그대로 돌아가요. 정맥 동맥이 뛰고 돌아가듯 지금 하는 사이 없이 하고 있다구요. 그러고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그냥 그대로 자기에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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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기다 넣지 않으면 갈아지지가 않는데 어떻게 거기다 넣지를 않겠습니까? 만약에 물건이라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보이는 데로 나오고 보이는 데서 안보이는 데로 들어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거를 중심 바퀴가 돌아가는데다가 넣어서 갈아내면은 모두 먹고, 또 갈아낼 게 있으면 또 갖다 넣고 이렇게 해서 먹는 이치와 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무조건 하라는 거예요.
자기도 중심이 빠지면 송장이 된다는 걸 왜 몰라요? 중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걸 결정짓고 나쁘다 좋다는 것도 알지요. 중심이 없으면 나쁘다 좋다를 어떻게 균형을 잡아서 알겠어요. 자기 중심이 있고 중심이 있는 반면에 균형을 잡기 때문에 두뇌에서 모든 거를 다 판단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사실인데도 그거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누구를 믿어요? 남의 뿌릴 믿을 거예요, 남의 나무를 믿을 거예요, 남의 고깃덩어릴 믿을 거예요, 남의 이름을 믿을 거예요, 허공을 믿을 거예요. 뭘 믿는다고 그러겠습니까.
자기 중심을 믿어야 해요. 팔뚝이 있기 때문에 손가락이 있잖아요. 팔뚝이 있기 때문에 손가락이 있으니까 뭐를 잡고 일을 하지요. 그러니 팔뚝과 손이 같은 거예요. 중심과 바퀴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공부가 아무 걸 넣어도 갈아낼 수 있는 그런 신비한 자기 조수로 만드는 법이지요. 배 고프다면 저절로 젖이 그냥 쭉쭉 나와야 그게 젖소지, 아! 배고픈 사람이 와도 젖이 안 나온다면 그건 젖소가 아니잖아요. 어떤 거든지 넣고 갈아낼 수가 있어야 젖을 먹이고 배고프지 않게 해주는 거지. 그래서 이거를 아무리 컵을 들고 물을 뜨고 이러는 작업을 한다 하드라도 마실 줄 모른다면 이건 헛것입니다, 헛것.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줄 수 있겠어요. 남이 배고픈 줄 어떻게 알고.
그러기 때문에 그 원리를 안다 하드라도 우리는 지금 개개인 봐도 그렇고 질문하신 분으로 봐도 그렇고 우주를 봐도 그래요. 중심이 있으니까 중심을 기준해서 그냥 막 돌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막 돌아가기 때문에 생사가 둘이 아니다 이런 게 나오고, 막 돌아가기 때문에 병 붙을 자리가 없다는 거죠. 도는 막 돌아가는 중심에 의해서 중심만이 아니라 바퀴도 중심도 물건 넣는 것도 모두가 한데 합쳐서 돌아간다면 천백억화신으로서 응신으로서 나투는 법이예요. 만약에 그거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화할 수가 있나요. 자기를 못 믿어 봤자지요, 뭐. 자기를 못 믿어 봤자 자기만 손해죠, 뭐. 딴사람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 주처를 믿고 일체를 거기다 놓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놓고 관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을 모아지게 돼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려면…
질문: 소원이 있을 때 불법도 세간법하고 똑같아 공짜가 없기 때문에…, 근데 제가 소원이 있어서 뭐를 어떻게 해야지 이럴 때 되든 안되든 희사심을 발휘한 그때부터 자기가 그걸 마음에 느꼈을 때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일이 성과를 내는 걸 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때 희사를 하는 겁니까?
답변: 그거는, 저거 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요? 그러면 바로 에너지가 그리로 가고 와요. 그러니까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대신에 공짜가 없습니다.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모든 걸 같이 하고 같이 먹고 사는 거예요. 일체 만물 만생이 다 같이 하고 같이 먹는 거라고요. 그런데 만약에 아주 고차원적인 양반이 죽었다고 해도 상여는 필요하지요? 상여가 아니라 영구차가 필요하지요? 그와 같이 누구에게든 영구차가 필요하고 영구차 끄는 기사가 필요하구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 같이 사는 거예요, 지금. 같이 먹고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두 같이 살고 같이 하고 같이 먹고 사는데 독불장군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공했다는 거예요. 모두가 공해서 같이 살고 같이 하고 같이 먹고 같이 하고 있는데, 내가 벌어다 먹는 거니깐 나 혼자 먹고 나 혼자 저거해도 괜찮은가요? 그럼 자기한테 돌아갈 복도 없거니와 전자에 억겁 전년서부터 지어 온 업보도 제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이날까지 끌고 다니면서 인간으로 진화돼서 창조되게끔 한 장본인이 누군가를 보란 말입니다. 바로 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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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원인이, 부처님이라고 했다, 주인공이라고 했다 자꾸 이렇게 하니까 그 이름에 또 매달립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이름에서 떼어놓으려고 했더니만 거기 또 집착을 하고 덤비니까 그거조차도 놔 버려라 이거예요. 모든 걸 놔 버리는데 얻다 놔 버리느냐? 내 주처에 놔 버려라 이겁니다. 모든 게 공한 도리에 다 놔 버리면 바로 그것이, 이것도 놔 버리고 저것도 내려놓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해 나가 봐라 이거예요. 그러고 그렇게 안되면 안되는 거는 자기 생각으로 능력이 없어서 안된다고 하기 때문에, 자기를 못 믿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체 만물 만생이 같이 행을 하고, 같이 먹고, 같이 살고 있는데, 인간 자체가 없으면 안되니까 그것이 한 울에 모든 게, 나아님이 하나도 없고 나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을 깨달아 보란 말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 습을 내버리고 고정되게 관념으로 잡던 습을 내버리고, 즉 말하자면은 이 도리가 전부 하나의 공한 내 주처다. 그러니 모든 거를 거기다가 일임해서 놔 버려라 이거예요. 놔 버리면서 나는 이거다 저거다 이유를 붙이지 말고 ‘해 주십시오’ 하지 말고 내가 그냥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주처에서 모든 걸 하고 있다는 인식만 가져라 이거예요. 주처에서 모든 걸 하고 있다는 거, 바로 자기가 주처니까요. 그러고 그대로 해 나가란 말입니다.
우리가 일 안하고 대가 받는 법 봤습니까? 한 달 일하고 대가를 받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소원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혼자 하고 혼자 먹는 게 아니고 전부 같이 하고 같이 먹으니까 내가 예배를 올려야지요? 안 그래요. 그러게 누구한테다 하느냐 이거야. 바로 자기 주처에다다 하는 거죠. 전부 귀합된 주처에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배 올리고 불 켜고 그런 거 그대로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 소원이 있으면 그렇게 예배를 올려라 이거예요. 올리면서 바로 나는 그렇게 믿어라 이거예요. 일체가 귀합된 자기 주처, 시간과 공간이 없는 대공의 이치를 바로 자기가 가지고, 주처에서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그냥 믿어라 이거예요. 그럼 개별적인 나 하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전부의 하나이기 때문에 갖다가 보시하는 것도 그런 데서 온 거다 이겁니다.
그래, 기껏 남을 부려먹고 나만 먹겠다 그러고 안 주려고 하는 그 마음새가 자비심이겠습니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겠어요? 그래서, 자기는 농사짓는 사람 생각 한번 안하고 농사짓는 거 가지고 다 먹고 살아요. 또 농사짓는 사람은 우리가 정치가라든가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 또는 사람이 죽으면 염하는 사람, 관 파는 사람, 신발 파는 사람, 뭐 별별 상업자가 다 있고 장사꾼이 있기 때문에 같이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깐 우리가 보시를 해도 그건 누구를 주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한테 자기가 보시하는 거죠. 자기가 먹고 산 거 고바고 감사해서 보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잘 파악해서 생활의 지침을, 모든 걸 파악하고 잘 검토해서 참구하고 나가라 이거예요. 누가 살고 있는가? 누가 가고 있는가? 누가 듣고 있는가? 누가 보고 있는가? 이것을 잘 살펴서 나를 알았을 때 그 모두를 알 수가 있는 거예요. 같이 살고 있다는 거를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나의 구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히 불생불멸 할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고 윤회에 끄달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 이 소리죠, 끄달리지 않고 말입니다.
법당에는 왜 가야 하는지요?
질문: 다 아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또 어떻게 생각하면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질문 올립니다. 내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을 믿고 일체를 다 그 자리에 돌려놓고 살라고 가르쳐주시는데요, 그렇다면 내 안의 자성불이 본래 있으니 내 마음에 불을 켜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면 굳이 법당에 계신 부처님한테 가서 절을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요?
답변: 항상 마음에 불이 켜져 있습니다. 무심의 불이 켜져 있는데 바깥세상에나 안 세상이나 똑같이 이끌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지요. 내가 한 거만큼 받게 돼 있고 내가 일한 만큼 대가를 받게 돼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법당에 올라가서도 부처님 형상이 바로 내 몸이요, 부처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임을 알면 절을 해도 둘이 아니니 걸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성스런 마음으로, 나아님이 없으니까 정성스런 마음으로 내가 나한테, 즉 말하자면 현재 의식이 잠재의식 그 자체에 한데 귀합된, 우주 삼라만상이 귀합된, 귀합된 부처님한테 절을 하면 바로 내 주처에 절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걸 예배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몸은 자기 주처에 예배를 올리는 거예요. 자기 몸뚱이는 항상 끌려 다니면서 예배 올리는 겁니다.
법당에 올라가도 내 주처에 모두 귀합된 대공(大空), 즉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없이 한데 귀합된 주처에 예를 올리는 거죠. 그러니깐 와서 불을 켜고 마음을 같이 한다 이 소리죠. 부처님과 나와 같이 하고 있다 이거예요. 자기 주처에다 예배 올리는 거라고요. 일체가 다 공한 도리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지금 살고 있는 거예요. 살고 있는 생명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누군 생명이 있고 누군 생명이 없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항상 중생들을 위해서 건지고 계시며, 부처님 마음은 항상 돼지 속에도 들어가고, 소 속에도 들어가고 일체 만 중생들한테 다 들어가는데 부처님이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얼마만큼 해야 이 도리를 알겠나 이렇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러니깐 모두들 공부를 지금 하는 거 아니겠어요?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닌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를 봐도 바로 그 몸이 내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개미를 봐도 개미의 생명도 내 생명이요, 그 개미가 먹고 살려고 기어 다니는 것도 인간과 같다 이거예요. 그러니 하나도 허탈리 볼 게 없어요. 다 귀중하죠. 그러고 유생 무생 일체 만물이 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명이 바로 일체 만물의 생명이다 이겁니다. 외형으로는 다 각각이지만 모두가 똑같은 생명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종교가 따로 있고 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이 똑같으니까 여러 생명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공했다는 소리가 나온 거지요, 생명이 없어서 공했다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항상 ‘주처에 모든 걸 놔 버려라’ 다 놔 버린 그 가운데 내가 하겠으면 그냥 하는 대로 밀고 나가라 이거예요. 내가 배가 고파서 밥 먹겠으면 그냥 내가 밥 먹으라는 거죠. ‘주인공이시여, 나 밥 먹겠습니다.’ 이러고 먹는 거 봤어요? 내가 배 고프면 그냥 밥 먹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처에서 움죽거리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있다 이겁니다, 자동적으로.
사상을 깨트릴려면
질문: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의미가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트리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 마음공부의 측면에서 일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답변: 마음법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것이 사상을 깨어버리고 우리가 본 근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체가 들어가면 모든 것을 베풀 수 있는 둘 아닌 도리를 배우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지. 사상이라는 그 자체가 ‘내가 있다, 내가 한다, 내가이런 일을 하고 이런 일을 이렇게 하고 간다.’ 이런 거니까. 또는 ‘내가 중생이다, 내 나이가 이러니까 이만큼 하면 수자의 근본이 이렇다.’ 하고 나를 세우는 그 자체가 사상(四相)이지.
그럼 그 사상 속에 다 들어있단 말이야. 아만이나 아상이나 남을 업신여겨 보는 거나 내가 제일이라고 하는 거나, 하여튼 모든 것을 얕게 보지도 말고 높이 보지도 말고, 부처님을 볼 때도 높이 보지도 말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더라도 얕게 보지도 말고 자기와 같이만 봐라 이거야. 자기 모습같이 생각하고, 자기 아픔같이 생각하고, 자기 생명같이 생각하고, 자기 살아나가는 데 어려운 것 같이 생각하고 모두가 둘 아니게 이렇게 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아래는 아랫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고 위는 윗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고 이렇게 서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거지. 근본 뜻은 평등공법으로서 나가되 질서를 정연하게 지키고 나가는 것이야. 이렇게 평등공법이 아니라면 질서를 지킬 수가 없고 계율을 지킬 수가 없어. 계율을 하나도 지킬 수가 없다구. 계율을 지킨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잘못된 게 있으면 화를 내고 악을 쓰고 이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것이 순간에 불뚝 나오는 거지 자기가 그럴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래서 그것이 바로 구업이 되고 그것이 바로 업이 되는 거야. 천연적으로 사상을 다 깨뜨려 버렸다면 관해서 거기다 놓고 다 평등하게 됐다면 스스로서 그렇게 돼, 스스로서. 스스로서 어떤 걸 보든지 나같이 볼 수 있어. 하다못해 꽃 한 송이를 봐도 나같이 볼 수가 있어. 내 설음같이 볼 수 있고, 내 아픔같이 볼 수 있고, 내 어려움같이 볼 수 있고, 못난 나같이 볼 수 있고, 잘난 나같이 볼 수 있고, 모두 둘 아니게 말이야. 이런 게 중요하지. 책을 위로 꿰고 바로 잘한다고 그래서, 그것이 질서정연한 게 아니야. 율법이 옳고 그르고 한다면 이건 벌써 선(禪)에는 그릇된 거라 이 소리야. 옳고 그른 게 없어야 돼.
그래서 그것을 옳고 그른 게 없이 해라 이러기 이전에 사상을 깨트려 버려라 이거야.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다 놓고 가면 다 그냥 계율을 지킬 수 있다 이거야. 함이 없이 하니까. 이 세상에 내가 하는 게 하나나 있나 보라구. 자연의 진리를 가만히 습득해서 봐. 처음에는 육안으로 보다가 차차차차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다보니깐 심안으로 들어가게 돼. 또 더 차차 하다보니깐 혜안으로 들어. 혜안으로 들다보니깐 전체 평등공법으로서 불안으로 들게 돼 있어. 이 모두가 사람이 마음을 맘대로 쓰라고 허용한 것이 마음이야. 마음을 맘대로 쓰라고 허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맘대로 쓰지를 못하는 거지.
우리가 지금 각처각급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뿔뿔이 마음이 흩어지니까 무엇을 하나 구성하지 못해. 그게 무슨 까닭이냐. 자기 마음과 자기가 통하질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기 몸이 집이라면 바로 자기 집 속에 주인이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 주인 없는 집은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업보성 인과성 이 자체가 그냥 순간순간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거지 빈집이니까. 들어왔다 나갔다 한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 내 집이, 내 몸이 어떻게 되겠어. 주인 없는 집이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 들어오는 것 보이지 않는 데서 대치를 해야 하는데 대치를 할 수가 없거든. 집이 비었으니깐 말이야. 그러니깐 공부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네 나무는 너부터 알아라. 네 뿌리부터 믿고 알아라.’ 이거야. 잘났든 못났든 이 세상에 내가 이렇게 나왔으니깐 상대가 있고 세상이 있고 진리가 있고 부처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깨달치 못함도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어? 아무 것도 없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나부터 상봉해야 된다. 왜냐? 몸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도 다 한마음으로 조절을 해야 되기 때문이지. 한마음으로 조절을 안 하면은, 얼른 쉽게 말해서 부처님의 마음속에서 보살들이 전부 탄생이 돼서 이 이름 저 이름 천차만별로 보살의 이름을 지어서 응신으로서 모든 중생, 일체 만물만생 천차만별의 중생들에게 다 베풀고 나가는데 내가 나하고 상봉을 못한다면, 또 상봉을 해서 의식들이 다 한마음이 돼서 한생각만, 그냥 생각이 아니야. 한생각 한다면 그냥 모두 어디든지 길 없는 길을 가고 그냥 함이 없이 거침없이 하는 거야. 그것이 부처님의 도리고 보살의 행이야.
우리가 부처님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부처님만 부처님의 마음을 보살의 이름을 지어서 내 놓는 게 아니야. 우리들도 부처님과 똑같애. 둘이 아니야. 부처님의 몸도 둘이 아니요, 부처님의 마음도 둘이 아니요, 생명도 둘이 아니요. 그 반면에 저 미생물, 물에서 노는 고기, 들에서 노는 짐승, 허공에 날라 다니는 새, 질척한 데서 사는 생명들 이런 것도 둘이 아니란 얘기야. 그 도리를 알면, 그러기 때문에 지렁이 하나도 스스로서 자기가 살면서 진화를 하게 돼 있어. 모든 게 다 진화를 하고 형성되고 진화하고 이렇게 내려오면서 뜻을 자꾸자꾸 일깨워 자기를 자기가 알게 되는 거지. 그러니깐 모두 어느 거 하나 없이 다 건질 수 있는 게 바로 이 공부요 깨우침이야.
나는 부지런히 깨우치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어. 부지런히 내가 빨리 해야겠다 하면은 빨리 하겠다는 대로 가슴이 답답하게 돼 있어. 또 느긋하면 느긋한 대로 게으른 생각이 들어가서 답답하구. 그러니까 양면을 다 놓으란 말이야. 그대로 물흐르는 거와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살란 얘기지. 어느 게 들어온들 어느 게 들어와도 물러서지 말구. ‘아이구! 이렇게 더러운 게 들어와서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도 하지 말구. 흙물이든 고름물이든 핏물이든 오물이든 모든 걸 들어오는 대로 그냥 집어삼킬 수 있다면, 그냥 바다와 같이 집어삼켜라 이거야. 그러면 편안해. 악도 집어 삼키고 선도 집어삼킨다면 그렇게 자유스러울 수가 없어. 그래서 그 가운데 자유가 있다 이런 말이야. 그러니까 사상이다 뭐다 하기 이전에 안에서 일어나는 거든 밖에서 들어오는 거든 일체를 나온 자리에다 다시 돌려넣는 작업부터 해봐. 그러면 하나하나 알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