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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찰건축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읽어내고 구현하는 작업은 아직도 미진하다. 도심사찰이 속속 생겨나면서 도심형 절충식 사찰모델이 제시되고 있으나, 콘크리트 건물 위에 기와지붕이 어정쩡하게 얹혀있는 이들 모델은 건축가들 어법으로 ‘어리숙한 전통에 기대는’ 조악한 형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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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같은 척박한 토양을 딛고서라도 ‘지금-여기’의 미학과 불교철학을 담아내려는 건축가들의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건축가 김개천(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교수), 김홍일(동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이일훈(후리건축 대표) 씨가 보여준 현대식 사찰모델을 살펴보고 이 시대 사찰건축상의 정립을 위해 요청되는 과제와 전망 등을 들어본다.
△전통사찰 양식에 창조적 변형을 시도한다
기와를 얹고 목재를 쓴 전통사찰의 건축 양식은 시대를 뛰어넘어 사찰 모델의 전형을 제시해왔다. 그래서 현대식 사찰건축을 시도하는 건축가들은 형식과 재료 면에서 전통의 양식을 차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에 대한 거부감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충북 괴산군 두타산 자락에 자리 잡은 법천사(설계 김개천)의 경우, 대웅전을 아름드리 나무기둥 대신 콘크리트와 까만 벽돌로 지어 올렸다. 3층 높이의 단층 대웅전은 외양을 석탑의 형태에서 따와, 단청이나 기와 없이도 절집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내고 있다. 실제 대웅전 뒤로 법당 건축이 예정돼 있어, 조만간 전통적인 가람 배치와 관련해 탑의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도 보인다. 대웅전 내부에도 사고의 변혁은 이어져, 후불탱화 역시 불상 뒤편 창문을 통해 보이는 두타산 능선이 대신하도록 했다. 자연과 부처는 둘이 아니라는 사상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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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교수가 설계한 충남 당진군 무문암과 충북 논산시 관동사는 전통양식의 배치를 따라 사찰 분위기를 살리는 가운데 현대적인 형태를 모색한 건축물이다. 바깥으로 노출된 기둥이 두 개의 수평면을 떠받치는 형태로 설계된 무문암 전각들은 처마와 툇마루 형태를 설정함으로써 전통건축의 양식을 끌어들였다. 대웅전은 유리에 필름을 붙여 한지 느낌이 나도록 했다.
김홍일 교수는 “처마와 마루 사이에 형성된 공간 사이로 이웃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와 건축물 간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개체간의 관계성에 주목한 연기(緣起)의 건축이다.
최근 설계를 끝내고 올 봄 착공을 앞두고 있는 양평 금회법당(설계 김개천) 역시 전통적인 ㄷ자 가람 배치를 살리면서 재료에 변형을 준 현대적인 사찰 모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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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 시도, 그안에 무형의 법문이
전통 사찰을 넘어서 새로운 사찰 양식을 선보이는 작업도 다수 진행됐다. 외부 형식에는 파격을 시도했고, 그 내부에는 불교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반영했다.
이일훈씨는 ‘지금-여기’의 건축자재로 보편화된 콘크리트를 이용해 현대사찰을 설계했다. 안성 도피안사 향적당은 기둥으로 지지하고 있는 공간 아래 활공루라는 빈 공간을 통하도록 설계돼, 다분히 폐쇄적이었던 절의 내부 공간을 외부로 끌어냈다. 옥상 끝 계단꼭대기에는 풍경의 울림으로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하늘의 문을 마련, 도솔천을 형상화했다.
김개천 교수가 설계한 만해마을 만해사ㆍ담양 정토사 역시 파격의 미학을 담고 있다. 두 건물 모두 네모반듯한 시멘트 건물이 전부지만, 그 공간에 막상 들어서면 무형의 법문이 쏟아진다.
정토사의 경우 색(色)을 통해 공(空)까지 드러낸 일획의 건축이라 평가받는다. 정토사 법당은 문이 곧 벽이다. 문을 모두 열면 건축공간은 사라지고 자연만이 남게 된다. 반대로 문을 닫으면 완전한 건축공간만 존재한다. 문 위에 비치는 산그림자는 곧 ‘벽’의 부분이 되기 때문에, 건축이 곧 자연이 되고 자연이 건축이 되는 합일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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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두 획을 그은 듯한 단순한 형태의 만해사도 마찬가지. 층계를 올라 안으로 들어서면 정작 텅빈 공간만 남을 뿐이지만 산이 저만치 눈에 들어온다. 만해광장의 무대에도 두 개의 기둥이 전부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 세트처럼 앉아있다. 김개천 교수는 “가장 단순한 형태야말로 가장 풍성한 것을 담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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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ㆍ건축미학 공존하는 새모델 고민해야
이처럼 몇 명의 건축가들이 이 시대의 사찰 양식을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 그와 관련한 작업은 철저히 개인의 원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과감한 설계를 시도한 몇몇 건축물을 제외하면, 이 시대 사찰양식의 전형이라 부를 만한 모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대 건축공학과 도창환 교수는 “조선, 고려, 조선 시대에는 나름의 건축 양식을 구현하고 있지만, 최근 100년 간 들어선 사찰 건축물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이렇다할 전형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물론 특정한 전형을 찾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포스트 모던시대에 절대적인 원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관심이다. 콘크리트 건물에 나무 지붕으로 이어지는 조악한 표현 양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이고, 늘고 있는 도심형 사찰 양식을 포함해 21세기 사찰 모델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건축가 이일훈씨는 “이도저도 아닌 전통복제형 건축은 역사의 빈공간으로 남게 될 것이 자명하다”며 “불교철학과 건축미학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새 시대 사찰 모델을 고민하는 것은 불교계와 건축계가 짊어져야 할 문화적 숙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