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 문화 > 문화
“경계없는 소리 전해요”
판소리 흥보가 무형문화재 박송희 명창


박송희 명창
작년 국립창극단 완창전 6월 무대에서 ‘흥보가’를 완창한 판소리 명창. 완창이 보편화된 판소리 무대에서 무엇이 대단한 일인가 싶지만, 78세의 노장이 세 시간이 넘는 소리를 꿋꿋하게 소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날렵한 발림까지 보인 것은 분명 놀랄 일이었다.

“하다가 그만두지 못해서 계속한 거야. 판소리는 중독성이 있어.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거든. 소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나와 같을 거야.”

64년간 소리에 업을 실어온,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박송희 명창을 만났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발음과 공력이 팽팽한 성음을 선보이는 박 명창. 그는 기자가 전수관을 찾은 3월 8일에도 전수생과 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소리를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수생의 소리를 북채로만 묵묵히 받아내는가 싶더니, 제자의 소리가 깊어지자 저도 모를 사설이 터져 나온다.

박송희 명창
“아아~으으가 아니라 아으~야. 단순히 목으로 기교를 부리려면 안 돼. 그냥 내질러 버려. 장작 패는 소리라 생각하고 내질러.”

‘대마디 대장단’이라 부를 정도로 남성적이고 강한 특성을 지닌 ‘박녹주제 흥보가’(박녹주 선생 스타일의 흥보가)를 유일하게 전승하고 있는 그는 소리의 변형이 많은 육자배기는 부르지 않고 꿋꿋한 남성의 소리를 담은 흥보가만 불러왔다.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두루 꿰차고 있는 박 명창이지만, 그의 소리는 늘 흥보가로 시작하고 끝이 났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스승(박녹주)이 물려준 소리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다.

“전통의 재창조도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나. 스승 가르침을 제대로 받았는지 생각하면 이리도 가슴이 답답한데, 내 손 내 입 내 목소리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자꾸 묻게 돼. 하지만 64년을 해도 모를 일이었어.”

세상이 다 바뀌어도 내 소리만은 바꾸지 말라던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박 명창은 줄곧 한길만 내달렸다. 놀부가 금은보화 가득한 박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흥보가에 빠져들었다. 배가 고프면 한 소리 장단에 빈속을 날렸고, 배가 부르면 기름 가득한 양질의 소리를 굽이굽이 펼쳐 올렸다. 돈을 벌고 싶어 시작한 판소리였지만, 십년 이십 년을 그렇게 넘기니 그저 소리 속에 살고 소리와 하나된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러나 배움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판소리는 구전심수(口傳心授), 즉 악보없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밤낮 스승의 눈과 입만 살피며 살았다. 스승이 한 소절 소리를 던지는 날이면 온 몸의 감각을 모두 열어젖혀야 했다. 소리를 받은 이후에는 한 호흡까지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그 감각들을 다시금 두드렸다.

몸 전체로 들고 나는 소리를 몇 십 년 이어가다보니 힘에 부치는 날이 왔다. 그래서 조금 편하게 할 량으로 스승 앞에서 펜을 들어 메모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객기를 부렸던 그였지만, 돌아온 건 스승의 참을 수 없는 분노 뿐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스승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스승의 그 노여움까지도 제 것처럼 느낀다.

“어디서 건방지게 글씨를 쓸 수 있었겠어. 소리를 어떻게 글자로 만들 수 있느냐 말이야. 밥먹을 때 볼일볼 때 가리지 않고 항시 들고 있는 소리를 어떻게 종이에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
요즘 전수생들은 ‘녹음기’라는 무기가 있어 언제 어디서건 스승의 소리를 그대로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전수생들이 그 옛날 한 소절을 익히며 목을 끓일 시간이면 요즘 전수생들은 이미 한 장의 교육을 끝낸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홀로 앉아 정리된 악보를 수십 번씩 읽어내며 기계음으로 남은 스승의 목소리를 무조건 돌리는 것이다. 세상 참 좋아졌고 가르치기도 백 배 수월해졌지만, 박 명창은 할 말이 많다.

제자에게 소리를 전수하는 박송희 명창
“소리는 쥐가 소금 먹듯이 하는 거라 했어. 소금이 한 포대 가득 들어있어도 쥐들은 언젠가 그것을 다 먹고 말아. 더디게 배워도 끝까지 가는 거지.”

박송희 명창은 그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국립창극단 안숙선 예술감독은 “박송희 선생의 소리는 하도 고급스러워서 신참들이 제 맛을 알려면 한참을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스승님께 폐가 되는 소리라는 생각에 음반에 담는 것도 주저하는 그이지만, 그는 최근 완창 무대에서 대가다운 완숙한 소리와 풍부한 너름새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익살스럽고 외설스러운 육담이 묻어나는 ‘놀보 박타령’까지 소화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놀보 박타령은 점잖고 담백한 여성의 판소리에서 금기시되던 대목. 이제 그는 ‘제비’가 아닌 ‘스승’이 쥐어준 박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리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가끔 염주를 굴리며 몰입하곤 하는 ‘나는 무엇인가’ 화두 참구에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사설에 녹아든 놀부와 흥부의 희노애락에 울고 웃는 경지를 넘어, 그는 무심의 소리로 대중에게 다가서고 있다. “어떤 잡념도 없고 아무 동요도 없는 마음에서 사설을 풀어낼 때 가장 큰 것을 품은 소리를 ‘문득’ 뱉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나.

경계없는 소리를 일구고 전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북을 치고 목을 쓴다.



박송희 명창은?


14~15세에 화순에서 박기홍에게 단가(短歌)와 ‘흥보가’ 대목소리를 배웠다. 15~17세에는 박동실에게 단가와 ‘심청가’ ‘흥보가’를 배웠으며, 16세 때 광주에서 안기선에게 ‘춘향가’ ‘심청가’를 익혔다. 여성국악동호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30세에 김소희에게 ‘춘향가’ ‘시청가’를, 박녹주에게 ‘춘향가’ ‘흥보가’ 전편을 사사받았으며 단가로 ‘만고강산’ ‘운담풍경’ ‘편시춘’ 등과 ‘숙영낭자전’도 익혔다. 1960년대에는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우기도 했다.
1983~·1995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ㆍ전남대학교 강사를 맡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상(1982), 한국방송공사 국악대상(1986), 국립중앙극장 공로상(1986) 등을 수상했다. 2002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강신재 기자 | thatiswhy@buddhapia.com
2005-03-11 오전 9:49: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