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는 지구적 화두인 생태학에 친화적입니다. 그 점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요. 둘 사이의 연관은 분명해 보이는데, 아직 본격 체계화는 되어있지 않아서, 불교생태학(Buddhist Ecology)은 아직 걸음마에 있습니다. 동국대가 여기 착안하여, 에코 포럼을 창안했습니다. 과학과 철학, 이론과 실천이 교류하는 이 잔치의 마당에 저도 토론자로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불교생태학과 에코포럼
저번 2월 12일이군요. 발제는 고영섭 교수가 하셨는데, 그분은 생태학의 위기와 그 불교적 해법을 붓다의 사성제의 틀에 빗대 인상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요약해 드리자면, 1) 고: 무엇이 문제인가. “푸른 대리석 구슬-하늘 위에서 본 지구를 가리킵니다- 이 위기에 처해 있고, 생태계의 혼란과 파괴가 심화되고 있다.” 2) 집: 왜 그렇게 되었는가. “법계(法界) 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무지로 하여 그리되었다.” 3) 멸: 이 상황은 개선될 수 있는가. “연기(緣起), 즉 사물들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해결의 관건이다.” 4) 도: 그럼 어떤 구체적 조치가 필요한가. “잊혀진 팔정도를 삶의 길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러분은 이 진단과 해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제에 대해 토론을 맡으신 구승회 교수께서는 “과연 그런가?”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물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을 통찰하는 것만으로 지구 생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순진하고 상투적인데다 순환논법의 딜레마에 걸려 있지 않은가.”
다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은 아주 중차대합니다. 불교생태학뿐만 아니라, 불교 구원론의 근본 테제가 바로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께서는 그동안 들은 제 강의를 참조하고,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한 다음,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오늘은 제 토론을 두고 오간 얘기 하나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고 교수께서는 생태의 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예의 불교적 해법인 ‘욕망의 억제와 최소화’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좀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욕망은 억제되지 않는다. 최소화도 글쎄… 누구나 욕망을 추구하며,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하려 한다. 해법은 욕망의 성찰과 대치에 있지 않을까.” 저는 다이어트를 예로 들었습니다. “다이어트의 비결도 음식의 종류를 바꾸거나 양을 줄이는데 있지 않다. 관건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 있다!”
당신 뱃살이나 빼고 하는 소리요?
그러자 저 뒤편에서 어느 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 엉터리없는 소리를…. 정말 그렇게 해서 다이어트에 성공하셨소? 성공했다면 어디 증거를 보여주시오.”
저는 웃으며 일어나 배를 걷어 올렸습니다. “인터넷에 올리지는 않겠지요. 누드가 아니니 상관없지만….”
입고 있던 바지는 한 2인치 이상은 헐렁해서, 주먹이 드나들 정도입니다. 말이 난 김에, 오늘은 먹는 얘기에, 제 다이어트 비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옛적 원시인들은 한번 식사에 물경 30킬로그램을 먹어치웠습니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먹고 며칠을 잠만 잤다는데, 언제 다시 먹게 될지 기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공포는 인류의 오랜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악덕이란 기독교나 유교의 설명과는 달리, 아직 적응 안 된 옛 습관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천지에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데, 아직도 원시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우걱대며 먹습니다. 간판 가운데 둘에 하나는 음식점이고, 내놓은 음식들도 상다리가 휠 지경입니다. 걸판지게 먹고도 상에는 남은 반찬이 낭자합니다. 밀려드는 손님에 급히 상을 치우는 소리가 가슴에 짜안히 맺힙니다. 아깝다!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 맺힙니다. 대부분 싸 달라기 상그러운 것들입니다.
너무 먹어서 생기는 병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의사들이 경고하는 성인병이나 암의 위험 등은 질리게 들었을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이 둔해집니다. 많이 먹으면 피가 위장으로 몰려 머리가 맑아지지 않고, 그 결과 집중력과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과식이 습관화되면, 감각의 기능이 떨어지고, 사물에 대한 생생한 접촉이 둔화됩니다. 꽃이 피는지, 바람이 부는지, 사람이 웃는지 우는지, 술이 무슨 맛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 흐릿함에 취하다 보면, 아니 그래도 조는 인생에, 우리는 확실히 꿈속에서 살다 가게 됩니다. 좀, 억울하겠지요.
퇴계와 더불어 영남의 좌우를 갈랐던 큰 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1)은 찾아온 고위 관리와 식사를 하다 말고, 호통을 친 적이 있습니다. 음식을 ‘등줄기’로 먹지 않고, ‘목구멍’으로 먹는다고요.
그렇습니다. 음식은 역시 등줄기로 먹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이 잘 살기 위한, 요즘 말로 웰빙의 바탕입니다. 이 기본 없이는 어떤 요가도 수련도, 장식도 성형도 모래 위의 누각입니다.
몸짱-위태로운 신화
사람들도 음식 먹는 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열풍입니다. 이미 불어버린 몸을 줄이고, 그 몸을 새로 ‘만들기’ 위해, 헬스클럽을 찾고 있습니다. 지지난해 겨울, 하버드 대학의 학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호텔 텔레비전 채널 중 여섯 개가 다이어트와 피트니스를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가리는 법을 설명하고 워킹 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는 진풍경을 두고 혀를 끌끌 찼더니, 어느 미국인 여교수가 “그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습니다. 저는 제 느낌과 판단을 설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퇴계 어르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 몸에는 정신(理)과 신체(氣)가 있다. 정신은 귀하고, 몸은 천하다. 정신을 존중하면(踐理) 몸이 자연스럽게 길러지나(養氣), 몸만들기에 치중하면, 정신이 황폐해진다.” 요컨대, 음식만 줄인다고 살이 빠지는 것이 아니고, 헬스를 열심히 다닌다고 정말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몸의 물신화는 지금 위험 수위에 와 있습니다. ‘몸짱’이 전국을 달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강도건 흉악범이건, 아줌마건 할아버지건 10대의 슬림한 몸매를 갖는 것이, 그리고 탤런트의 얼굴을 모방해 갖는 것이 선망을 넘어 신화가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퇴계 어르신의 경고대로, 몸만들기(養氣)에만 치중하여 자기 자신을 잃고(賤性) 만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억하십시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몸은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도도한 ‘몸’의 시대에,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쌍팔년도의 철지난 확성기 소리 같아 보이지만, 잘 살고 싶다면, 그러나, 웃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의 비결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다이어트의 성공 여부 또한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에코 포럼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한 어느 음식-마음 전문가께서는 그 이치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잘못된 음식 습관은 주로 심리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것, 그것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다이어트와 건강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