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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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연구 30년 외길, 은정희 교수
"모든 의구심 원효 안에서 풀지요"
은정희 전 서울교대 교수.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갈라진 세상. 마음마저 갈라져 삶은 거칠어져만 간다. 이 같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논할라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은 원효 스님이고, 화쟁사상이다. 하지만 원효 스님을 꼼꼼히 읽어낸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허무한 담론만 무성한 것은 아닐까.

말의 성찬에 등 돌리고 평생 묵묵히 원효 사상 연구에 몰두하며 1991년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 역주와 2000년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이어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장의(二障義)>까지도 최근 완역하는 쾌거를 이룬 은정희(66) 前 서울교대 교수는 원효 스님을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은 교수는 1983년 박사논문에서 원효 스님이 <대승기신론>을 삼세념(三細念)인 무명업식(無明業識)·전식(轉識)·현식(現識)이 아라야식 자리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에 주목, 이를 드러내 <대승기신론>이 중관과 유식의 지양·종합이라는 학설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번역에 몰두해 원효의 주요 저술을 세 권이나 번역해 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은 교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원효 저술은 당시의 철학분야를 넘나드는 자유로움과 웅대한 스케일, 그리고 함축적인 서술로 인해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게 정평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 교수의 업적은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은정희 교수는 요즘도 7개나 되는 강독 준비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번역에 가장 애를 먹인 저술은 이번에 출간한 <이장의>다.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실천적 단계를 설명한 <이장의>는 유식사상이 집약돼 특히 어려웠다. <이장의>를 읽으며 느낀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 교수는 “한 자 한 자가 암호 같았다”며 고충을 토로한다. 하지만 일본의 오오초오 에니치(橫超慧日) 박사가 편찬한 <이장의>의 연구편에 나오는 전거(典據)를 찾아 하나씩 찾아 읽으며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고, 몇 차례의 강독을 거치면서 이해도를 높였다. 결국 수년간의 작업 끝에 오오초오 박사가 찾지 못했던 전거들을 30여개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각고의 노력으로 출간된 번역본 <이장의>는 높은 완성도로 학계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더 이상의 번역은 없을 것이다”는 찬사까지 나오고 있다.

은 교수가 이처럼 ‘험난한’ 번역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효 스님의 원문을 읽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보니 원효 스님에 대한 논문들도 자연 날림이 될 수밖에 없지요. 언어는 기초에 해당하는데 이를 등한시 하고 연구를 하다보니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우리 학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은 교수에게 원효학은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문제에 처음 눈뜬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고성(古城)에서 범인을 찾던 탐정 조수가 거미줄이 잔뜩 걸려 있는 왕좌를 보며 “저기에 아름다운 왕비와 위엄 있는 왕이 앉아있었겠지”라고 되뇌는 <괴도 루팡>의 대목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내 앞에 있는 책상보다 내가 더 먼저 없어지겠구나”며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소녀는 두어 달 간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민을 거듭했다. 정답은 찾지 못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고 다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임시로 봉합됐던 문제의식은 1960년 조계사 일요법회에서 이기영 선생의 <금강삼매경론> 강의를 들으면서 원효 사상을 전공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발전했다.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이기영 선생의 강의는 그에게 어릴 적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생사에 대한 의구심을 원효 안에서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8년 후 은 교수는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 본격적인 원효 연구의 길로 접어들었다. 태동고전연구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8년간 우직하게 한학을 익혔고, 김동화·이종익 교수 등 불교학 거장과 강독을 함께 하며 불교학을 배워나갔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강독은 난해한 불교 개념들을 풀어내는 값진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는 “나의 원효 저술 번역은 강독의 결실이다”고 말한다. 지금도 <인명론(因明論)> <구사론(俱舍論)> <종경록(宗鏡錄)> <조론(肇論)> <예기(禮記)> 등 7개 고전 강독이 그의 동숭동 자택에서 이뤄진다. 덕분에 그의 집은 언제나 공부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다.

은 교수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30여 년간 학문의 길을 한결같이 걸을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 신주련(92) 씨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컸다. 군산 동국사를 다녔던 어머니는 절에서 들은 부처님 말씀을 어린 은 교수에게 전해주곤 했다. 그 말씀들이 어찌나 귀에 쏙쏙 들어오던지 귀 기울여 듣곤 했단다.

이장의는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실천적 단계를 설명한 책이다.

불법과의 인연이 지중했던지 출가의 기회도 있었다. 성철 스님과 석남사 인홍 스님은 읽어보라며 책을 주기도 하고, 절에 함께 가자고도 하며 은 교수에게 출가 의사를 은근히 떠 보기도 했다. 은 교수 역시 출가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공부할 여건이 갖춰져 있었고, 함께 공부하는 선후배도 많은 속세를 굳이 떠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원효 스님을 화두삼아 정진하는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유발비구니’라 부르니 반은 출가한 셈이다.

원효 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은 교수는 주저 없이 ‘부주열반(不住涅槃)’을 꼽는다. “‘열반 상태에 머무르지 말라’는 의미의 이 말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다른 표현입니다. 원효 스님은 줄곧 부주열반을 강조했지요. 원효 스님의 가장 큰 목표는 보살도의 실천이었음을 웅변하는 말입니다.”

지난 해 8월 서울교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은 교수는 이제야말로 ‘내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며 희색이 가득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원효 저술을 번역할 계획이다. 자신이 세운 서원대로 원효 저술을 완역하고, 제자들과 한국불교사를 새로이 써나갈 생각이다. 그것이야말로 후학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은정희 교수는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1960)하고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서 <기신론 소·별기에 나타난 원효의 일심(一心)사상>으로 박사학위 취득. 1984년부터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역임. 역서로는 <대승기신론소·별기> <금강삼매경론> <연산군일기>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원효의 삼세·아라야식설의 창안’ 등이 있다.
글=박익순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ufo@buddhapia.com
2005-03-07 오전 9:50:00
 
한마디
ㅎㅎ 전 하나님을 믿지만..원효를 닮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6-06-14 오후 11: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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