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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파의 모국인 인도에 요만한 탑이 있느냐? 탑파의 경신국(更新國)인 중화에 요만한 탑이 있느냐? 실로 너무나 탈신(奪神)적 기교다. 당장(唐匠)의 성업(盛業)이라 말하되 나는 부(否)타 한다.(…)당대 탑파의 어느 것에서 이 수법의 일단을 찾아내려느냐? 나는 오직 백제의 혼이 이 탑에 남아있다 하노라.”
다보탑을 바라보는 우현 고유섭 선생의 시선에는 탁월한 예술미에 대한 경탄과 민족적 자긍심이 가득하다.
올해는 한국미술사학의 개척자며 선구자로 추앙받는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태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다. 선생은 40여년의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의 근본과 한국미술의 실상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미술사학 분야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의 미를 ‘무기교의 기교’ ‘무관심성’으로 표현한 이도 선생이었고, 국보78·83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림에서 화기(畵記)에 처음 주목한 이도 선생이었다. 이 같은 안목은 미술사에 대한 통찰력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2월 26일 이화여대 학생문화관에서는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한 뜻 깊은 행사가 한국미술사학회(회장 홍선표) 주최로 열렸다. ‘우현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그것.
이번 학술대회에는 선생의 수제자인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교수를 비롯해 강경숙 전 충북대 교수, 서울대 안휘준 교수, 윤용이 명지대 교수, 김리나 홍익대 교수 등 300여명의 후학들이 참석해 선생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정우택 동국대 교수가 ‘고유섭과 불교미술’을 박경식 단국대 교수가 ‘고유섭과 탑파연구’를 발표하는 등 고유섭 선생의 불교문화재에 대한 연구업적과 한국미술사에 미친 영향이 비중있게 논의됐다.
정우택 교수는 “고유섭 선생은 불교 수용이 한국 문화의 정체성에 큰 역할을 했음을 지적했다”고 전제한 뒤 “개별작품 고찰 뿐 아니라 제작의 근본을 이루는 불교의 교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교리에 따른 도상과 양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데 큰 의의를 부여했다. 도상학적 탐구를 통한 예술적 가치 규명과 신앙적 가치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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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 교수는 선생의 한국미술사 시기구분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조각예술은 시종 불교와 더불어 성쇠를 같이 했다”고 봤던 선생은 불교조각을 중심으로 삼국·통일신라의 미술사적 시기구분을 시도했다는 것. 정 교수는 “선생의 시대구분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며 “제한된 자료를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박경식 교수는 고유섭 선생의 가장 대표적인 연구라 일컬어지는 ‘탑파연구’를 조명했다. 박 교수는 “현존하는 불교문화재 가운데 가장 많이 존재하는 것이 탑이며,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발달한 분야가 석탑이다”며 “이 같은 석탑을 최초로 주목한 한국인이 고유섭 선생이다”고 말했다.
또 “탑파연구는 문화의 암흑기였던 1930년대에 이뤄진 것으로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탄신 100주기를 맞아 선생의 학문세계는 민족주의적인 운동 차원에서도 규명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경기도 출생으로 1925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1933년 3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십여 년간 한국미술사 연구에 주력하면서 전국의 석탑을 양식론에 입각해 체계화했다. 이 같은 업적으로 우리 미술사를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 <한국미술문화사논총> 등의 저서와 60여 편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