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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또한 수천 년이 넘게 이어져 오던 우리 조상들의 민속 신앙이 숨어 있다. 산신이 있고, 칠성이 있고, 용왕이 있다. 그리고 절에는 역사가 있다. 천 년이 넘는 고찰마다에는 그 절마다의 독특한 역사가 들어 있다.
이 책은 조용헌 교수(원광대 대학원)가 지난 18년 동안 발품을 팔아다닌 우리나라의 사찰 22곳을 소개하고 있다. 선운산 선운사, 모악산 금산사, 두승산 유선사, 금강산 건봉사, 북한산 승가사, 미륵산 사자사, 연암산 천장사, 오대산 상원사, 수봉산 홍련암 등.
이 책에 등장하는 22곳 사찰에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즉 삼재(三才)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에서 최초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는 지은이 특유의 시선이 담겨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은 불교를 매개로 해서 아직까지 살아 숨쉬는 한국의 민속신앙이 사찰이라는 공간 속에서 어떻게 녹아 흐르는지를 불교민속학자의 시각으로 조명한 일종의 사찰 기행문집이다.
지은이가 좋아하는 사찰의 3대 조건은 호젓하고, 고승이 많이 머무른 곳이어야 하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김제 만경 평야의 아스라한 지평선 끝자락에서 서해를 마주보고 있는 망해사를 가리켜 3대 조건을 충족시킨 사찰이라고 선뜻 꼽는다. 그래서 그는 “월급쟁이들이여, 한탄만 하지 말고 해질 무렵 장엄하게 붉은 빛이 감도는 바닷물을 보러 오라. 그 노을빛에 마음을 던져보라”고 속삭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스님들은 수행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사찰을 찾거나 짓는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불령산에 올라 목적지도 이정표도 없이 능선과 계곡을 탔다. 그리고 마침내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며 7일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는 곳이 바로 청암사 수도암이다. 또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선사가 1년간 보림했다는 연암산 천장암도 명당중의 하나로 꼽힌다. 절터의 기운이 센 곳만을 좋아했다는 만해 스님이 한때 머물렀던 금강산 건봉사는 풍운아 같은 만해 스님의 기질을 닮았다고 지은이는 소개한다. 건봉사가 대체적으로 골기가 어린 암산의 절이라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바위 투성이의 센 터에 자리잡은 산에 위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건봉사는 전문 수행자나 기가 센 사람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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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터가 때론 민간신앙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대표적인 흔적이 연못 자리에 절을 지은 것인데 이는 우리나라가 민간신앙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숭배해온 용(龍)에 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는 농경 사회이고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인데, 가뭄에 비를 내려주는 것은 상상의 동물인 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미륵신앙의 발원지인 익산 미륵사를 비롯해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경주 황룡사, 치악산 구룡사, 장흥의 보림사터 등 수많은 사찰들이 연못 자리에 지어졌다.
지은이는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도량도 소개한다. 임랑 묘관음사, 동리산 태안사 등이 바로 그것들인데 바다에 절이 위치한 것은 주변이 확 터져 마음이 트이며, 만물을 포용하는 포용력을 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의 방법인 해조음과 관련이 깊다고 설명한다. 타성에 젖을 때는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이 효과적인데 그 소리들 중에서 파도소리(해조음)가 좋다는 <능엄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불상이나 탑 등의 미술사적 입장에서 바깥에 드러난 성보문화재들을 소개한 사찰기행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절을 다니던 우리 조상들이 보던 풍수, 민속신앙 등이 내재된 내부적 시각의 사찰 소개서라는데서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 <조용헌의 사찰기행>
조용헌 지음
이가서 펴냄/1만6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