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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는 ‘역사바로세우기’의 무풍지대인가.
지난해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 특별법이 통과된 데 이어, 최근 친일파 후손의 땅을 환수하기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되는 등 광복 60주년을 맞아 어느 해보다도 역사바로세우기 바람이 거세다.
하지만 웬일인지 불교계는 조용하기만 하다. 일제치하 교단 지도부 스님들 가운데 상다수가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라는 의혹에 대해서조차 진상의 실마리를 내놓지 못한 채 외면만 하고 있다. 이에 불교계의 역사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조차도 제대로 발굴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고 보면 역사인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들고 나오는 것이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3·1운동 당시 전국 사찰에서 거국적으로 참여했지만 이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단적인 예.
김법린·김상헌·유석규 스님 등 범어사 스님들이 주도한 동래장터 시위, 이장옥·이찰수·오학성 스님 등 통도사와 표충사 스님들이 주축이 됐던 단장 장터 시위, 김봉신·홍태연 스님등 해인사 스님들이 주도한 합천 읍내 시위 등 전국 곳곳에서 스님들의 주도로 시위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뒤따르지도 않았고, 3·1운동과 이들 사찰과의 관련성 또한 강조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3·1절’하면 교회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1930년대 남부지방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사천 다솔사도 마찬가지 경우다. 현대 다도(茶道)의 중흥조로 불리는 효당 최범술 스님의 출가 본사로 더 유명한 다솔사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만해 스님과 애국지사들의 정신이 차향만큼이나 깊게 서린 곳이다.
다솔사는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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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솔사는 만해 스님이 당수였던 만당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만해 스님 회갑연 후 직접 심었다는 황금 편백만이 남아 뿌리를 내리며 역사 속에 묻힌 그 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다솔사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는 별로 남아있지 않고, 연구 또한 미흡하다. 사천시청 문화관광계 조영규 계장은 “다솔사가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새롭게 조명하고 연구,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예산이나 자료 부족 등으로 묻어두고 있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가 이처럼 파묻혀 있으니 ‘부끄러운 친일의 역사’가 거의 다뤄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종단들의 근대적 기틀이 일제시대에 마련됐다는 점에서 친일사는 현 종단들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 만큼 불교계가 전력을 기울여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종욱 스님의 예를 보면 친일사 연구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 이종욱 스님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총본산 건설운동을 주도하여 조계사(당시 태고사) 창건을 성사시켰으며 1941년 근대 최초의 합법적인 교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창립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일제 말 친일 행각을 벌여 독립운동가와 친일승이라는 비판이 엇갈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종욱 스님 연구가 박희승 씨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해 친일승으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이종욱 스님의 일제 협력은 종단을 세우기 위한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연구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련된 자료를 모두 공개하고,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행적을 올바르게 조명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광식 교수(부천대)는 “근현대불교사는 오늘의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자료수집·분석조차 이뤄지지 않아 연구의 황무지로 남아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근현대조선불교사가인 김순석 박사(한국국학진흥원)는 “종단이 중심이 돼 한시적인 조사·연구 기구라도 구성해서 불교계의 친일행각을 제대로 규명하는 한편, 독립운동사도 함께 발굴해야 불교사가 바로 선다”고 지적하며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는 불교계가 참회하고, 국민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