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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스님은 35년 대륜 스님을 은사로 출가, 38년 양주 봉선사에서 사미계 39년 개운사에서 한영 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했다. 1988년 대한불교 대승종을 창종, 초대종정에 취임했다.
영결식은 3월 1일 오전 9시 서울 잠실 현대아산병원에서 봉행된다.
흥도사 (02)2234-2198
서울아산병원(02)3010-2294
다음은 1998년 현대불교신문 7월 22일자 184호에 실린 도암 스님 <수행한담> 기사이다.
“번뇌근본 제거못하면 행복 기대못해”
우리집은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나와 내 형님, 동생이 모두 출가를 했습니다. 한 집에서 다섯 명이 스님이 되는 것도 과거세부터의 지중한 인연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할아버지께서는 60세에 마곡사로 출가를 하셨는데 늦깎이도 그런 늦깎이가 없지요. 그런데 출가를 한 동기가 참으로 기막혀요.
할아버지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술을 많이 먹었어요. 어느날 둘째 아들이 술을 많이 먹고 곤드레 만드레 된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야단을 쳤더니 술김에 욱 해서인지 바로 산으로 가 목을 매 죽어버렸어요. 그러니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어요. 그날로 재산을 다 아들들에게 분배하고는 마곡사로 가 출가해 버렸지요. 어느날 기산스님이 된 할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와서는 “너희가 6형제를 두었으니 3명은 출세시키고 3명은 출가시켜 도인을 만들어라”고 하셨어요. 한사람만 출가해도 구족이 천상에 난다는데 아들이 6명이나 있으니 그 반을 부처님에게 바쳐 집안 전체가 불은을 입게 하라는 것이었지요.
하여튼 할아버지 말씀대로 우리 형제 셋이 중이 되었어요. 그런데 내 동생이 머리를 깎은 계기가 또 기막혀요. 우리 사촌이 토목과장이었는데 수원에 땅을 많이 사가지고 농사를 짓고 닭과 소도 키우고 잘 살았어요. 동생이 그 사촌 일을 도와주었는데 일이 힘드니 사촌은 잘 사는데 나는 왜 이꼴인가 하는 비참한 마음이 들었던지 논에서 물꼬를 트다 고꾸라졌어요. 누가 업어왔는데 머리를 다쳤는지 정신이 온전치가 않았어요.
그때 내가 용화사에 있었는데 절에 데려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계수씨가 가까이 있는 무당을 불러 굿을 크게 했답니다. 그래도 낫지 않고 정신이상이 더 심해지니 장정들 셋이 묶어가지고 내가 있는 절에 데려다 놨어요. 그래 미친 동생을 이끌고 삼칠일 기도를 지성으로 했지요. 그랬더니 정신이 제대로 돌아와 바로 법륜사로 가 출가를 시켰습니다.
우리 집 사연이 이렇듯이 사람사는 것은 모두가 고해(苦海)요, 불난 집의 형국이라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우리의 모든 삶이 고통입니다. <12인연경>에서는 “번뇌에서 업이 생기고 업에서 고가 생기고 고에서 번뇌가 생긴다. 이 세가지는 끊임없이 상생(相生)하여 머물러 있음이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우리들 인생사에 있어서 과거세로부터 이미 어어져온 무명의 번뇌를 제거하지 않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고는 영영 없어지지 않고 내세, 그 내후세까지도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고의 근본, 번뇌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은 생활 곧 업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지요. 출가하여 부처님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의 실상을 바로 보아 모든 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무상한 것은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 괴로움은 곧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받아들여 부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걷겠다는 의미이지요.
내 속명이 성품 ‘성(性)’자 길 ‘도(道)’자 ‘성도’입니다. 성품을 닦아 도인이 되라는 뜻에서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인데 나는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16세에 사간동 법륜사에서 출가했습니다. 공양주 별좌를 3년 하며 절생활을 익혔어요. 그때 5원씩 봉급을 탔는데 공부하기 위해 모아두었다가 양주 봉선사 불교전문강원에 가서 운허스님에게서 경학을 배웠지요. 금강산 유점사에 선지식들이 많이 있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금강산으로 갔습니다. 그때 유점사는 굉장히 큰 절이었어요. 80여명의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지내며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지요. 유점사에서 같이 공부한 스님들이 덕암스님(현 태고총림 방장) 법홍스님(현 원효종 종정) 능인스님 등이예요. 거기서 지내다 유점사 말사인 철원 심원사 화산경원(華山經院)에서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를 모두 수료했습니다. 심원사에서는 노전 볼 사람이 없어 노전 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김장같은 것을 하면 무채를 아주 많이 썰어야 했는데 썰기가 지루하니까 누가 잘 써느냐 내기를 했어요. 채를 썰어 도마를 탁 쳐서 그 채가 천정에 가 가장 많이 붙는 사람이 1등을 하는 그런 것인데 내가 2등 한 기억이 나요.
요즘에는 일반사회에서는 물론 절에서조차 말을 함부로 하고 헛소리도 많이 하는데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강원에서는 아무리 나이어린 사람에게도 ‘하게’나 ‘해라’를 하지 않고 존대말을 했지요. 말부터 남을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예절이라는 것은 전염성이 있지요. 내쪽에서 공손하게 대하면 상대방도 예절을 갖추고 이렇게 하다보면 이 사회 전체가 예절 바른 사회가 되는 것이지요. 예절바르고 자비심 많은 사회가 되어야 나라와 민족이 발전하고 인류가 화평합니다.
사람은 본래 청정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명에 휩싸여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청정한 마음이 연기의 이치에 의해 밖으로 발산되어 나타나는 힘이 자비입니다. 자비의 ‘자(慈)’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남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지요. 요새, 사랑 사랑 하고 어디서나 사랑타령을 하는데 불교의 자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저변에는 다분히 이기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응해주지 않으면 그 사랑은 언제 증오로 돌변할 지 모릅니다. 또 이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은 도저히 그럴수 없다고 하는 차별심이 들어있는 것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어떤 인연에 좇아 생겨났을 때 또는 자기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서 설정되었을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무한의 힘으로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한 차원 높은 형태의 것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자비는 바로 이와같은 모습의 사랑입니다. 자비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이른 바 불염오애(不染汚愛)라 표현되는 순수한 정에서 우러나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하지만 자비의 세계에서는 사랑하고 말고 할 원수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을 세워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다짐이고 실천이지요. 곧 자비의 실천입니다. 발심하고 발원하더라도 그 마음에 반드시 자비의 실천이 따르지 않고서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을 세워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바로 신심을 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신심을 내느냐. 원효스님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설명해 주셨어요.
첫째는 곧은 마음(直心)을 일으킴입니다. 그것은 구부러지지 않은 마음이고 모든 사물의 근본을 비뚤게 생각하지 않는 바른 마음입니다. 둘째는 깊은 마음(深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근본이 참되고 한결같음을 깊이 인식하고 그러함을 더욱 빛나게 하는 마음이지요. 셋째는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大悲心), 즉 한 사람의 중생도 버림이 없이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나는 신도들에게 늘 말합니다.
현대불교 생활불교 실천불교를 하려면 남을 위하는 이타심과 자비를 가져야 한다. 이사무애 사사무애 원융무애의 도리로 동사섭을 해야 하고 차별을 두지 말아라. 불자들이 남과 똑같이 욕심부리고 성내고 자기만 알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부처님제자라며 절에 아무리 다녀도 헛 거예요. 책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전에 벌써 민주주의를 주창하신 분이에요. 평등한 성품은 귀천이 없어 거지나 대통령이나 다 똑같이 성불할 수 있는 부처씨앗을 가지고 있어 열심히 수행한다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발원했으면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근본을 믿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사물의 근본은 참되고 한결같다는 사실을 믿고 즐겨 그와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원효스님은 “신심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신심은 성숙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원하고 발원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하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佛法)이라는 진리에 젖어들어 마침내 자기자신을 향상시키게 됩니다. 원을 세워 행한다는 것은 또 남을 도와 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하지요. ‘원(願)’은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가령 농사가 잘 되도록 마을제를 열어 빈다거나 또는 자식을 위해 비는 어머니의 기원 등은 그것이 비록 성취된다 하더라도 극히 유한적이고 일시적인 즐거움에 그칠 따름입니다. 더구나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나 돈벌이가 잘 되도록 소원하는 데 그친다면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내 나이 80이 가까워 몸은 거동이 힘들지만 조석으로 <고왕경>을 독송하고 <능엄경>도 독송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은사이신 대륜스님은 기도에 아주 철저하셨던 분이예요.
신심에 있어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어요. 새벽에 일어나 예불모시고 기도에 들어가면 6시가 넘어서야 끝내셨어요. 기도를 열심히 하세요. 그냥 할 것이 아니라 서원을 세워 지성으로 하세요. 법회때 늘 불자들은 사홍서원을 하지요. 사홍서원을 앵무새처럼 그냥 따라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뜻을 잘 새겨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는 남을 이롭게 하겠다는 원입니다. 마치 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을 깨우듯, 즉 각성하지 못한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고 또 가 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고야 말겠다는 숭고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저 가이 없는 중생 모두를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게 하겠다는 큰 뜻이지요. 두번째인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번뇌망상을 남김없이 끊어서 저 무량한 법의 바다로 들겠다는 서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번뇌 아닌 것이 없다 할만큼 온갖 번뇌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저변에는 귀중한 불성이 잠겨있어서 그것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만 마련된다면 보리 곧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불성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 첫 단계는 바로 번뇌를 끊는데서 얻어집니다. 그 많은 번뇌를 남김없이 끊어버림은 무량한 법의 바다로 들어가는 길이 되는 것이지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법의 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문안에 갈무리되어 있는 온갖 보배도 이 입구를 통하지 않으면 볼 수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불교의 세계에 들 수 있는 문은 바로 부처님 법문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위없는 대도라 할 지라고 힘써 배우고 닦지 않으면 그것을 보지 못하여 이룰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지요. 부처님의 지혜는 광대무변하여 나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여 그 깨닫고 행하는 바가 완전하고 원만하기 때문에 각행원만이라고 하는데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와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는 서원은 부처님의 교법에 들어 힘써 배운 바른 도리 이루어 남도 이롭고 나도 이롭게 하자는 것이지요.
요즘 말세라고 합니다. 말세일수록 자비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동체대비의 마음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교가 이땅에 전래된지 1600년 동안 민족과 더불어 키워온 자비의 나무가 지금은 비실비실 시들어 가지나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비는 어떠한 한계도 없이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불교의 진리, 대승의 수레가 멈추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지요.
세상이 각박할 수록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 사회를 아름답고 원만하게 만들어 갑시다. 사회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욕심 또한 무한정 커지고 있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대승의 보살이 되고 수레가 되어 연화정토로 일구어 나가는데 온 불자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이경숙 기자(gslee@buddhap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