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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이 24일 공개한 이 자료들은 통도사 주지였던 설우 스님이 주지직에서 은퇴한 구하(1872~1965) 스님에게 써준 독립자금 관련 영수증 5장과 안창호 선생 등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나타내는 ‘사변시(事變時ㆍ3.1운동을 지칭) 출금증’ 등이다.
‘중요문건(重要文件)’이라고 쓰인 종이에 조심스럽게 싸여진 이 문서는 구하 스님이 독립운동 기밀비로 총 1만3천환을 내놓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설우 스님이 구하 스님에게 1927년 써준 영수증들은 구하 스님의 재산을 모두 통도사에 내놓은 것처럼 꾸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빼돌렸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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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시 출금증’ 문건에는 ▲안창호 선생 임시정부 국무총리 재직시 5천환 ▲초월 스님 경성 혁신공보 사장 시절 2천환 ▲이종욱 당시 종무원장 군자금 수집 때 3천환 ▲온천서 독립운동가 장인섭에게 1천환 ▲범어사 공동으로 상해서 500환 ▲동래서 독립운동가 장래륜에게 500환 ▲통도사서 독립운동가 신정흔에게 500환 ▲김포광에게 500환 ▲정탁의 독립운동 참여에 100환 등의 독립자금 지원내역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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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또 “생전에 월하 스님이 왜 이 귀중한 자료를 내놓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며 “이번 자료 공개는 스님의 친일행적에 대한 미화보다는 스님께서 열반하기 직전에 남기신 ‘절대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등의 유훈을 놓고 볼 때도 스님이 결코 단순히 친일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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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직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고 수차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구하 스님은 1884년 13살에 양산군 내원사로 출가한 후 1889년 18세에 경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전국의 산천에서 만행하던 스님은 29세 때 통도사와 인연을 맺어 성해 스님의 법제자가 돼 ‘구하’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34세인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중 생사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 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 귀의한다네’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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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인 경봉 스님과 함께 명필로 소문날 정도로 필력을 자랑하던 구하 스님은 1917년 30본산위원장(본사주지회의 의장)으로 일본시찰을 하기도 했으며 현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세우고 경남일대에 수많은 포교당을 세워 교육과 포교에 진력했다.
1965년 11월 24일 구하 스님은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