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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는 봉복사에 마련돼 있으며, 영결식은 24일 오전 11시 원주불교장으로 거행된다.
태허 스님은 1916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36년 공주 갑사에서 호응 스님을 은사로 출가, 공주 마곡사 전문 강원 대교과와 일본 오사카 관서 고등부기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충남 부여 무량사 주지, 공주 갑사 주지, 원주 구룡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95년부터 봉복사에서 주석해왔다.(033)732-4800
다음은 1999년 3월 본지 ‘수행한담’에 보도된 태허 스님의 법문 내용이다.
이곳 강원도 골짜기에도 봄이 찾아 오려는지 이른 아침마다 맑고 투명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결 정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경제 한파로 얼어붙은 중생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봄이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일수록 많이 가진 이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돌보며 지켜주는 보살행을 펼쳐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의 생계 유지에 빠듯하고 여유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펼치는 보살행의 근원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 힘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의 번뇌가 고통에서 나오듯 보살행도 고통에서 시작됩니다. 도저히 못 견딜 정도의 쓰라린 고통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강력한 욕구가 바로 보살행 실천의 출발점입니다.
보살행의 원천은 책에 있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 바꾸어 말해서 그 삶속에서 겪는 무한한 고통이야말로 보살행의 동력인 것입니다. 사실 고통은 우리에게 한(恨)을 줍니다. 특히 그 고통이 타의로 생긴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하신 분노와 진심, 개인적인 복수심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한이야말로 보살행을 발심하게 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이라는 놈은 중생에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전환되고 보살에게는 서원으로 바뀌어 진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똑같은 원인이 두갈래로 나뉘어 지는지 혹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자신이 아픔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낼때는 한이 서원으로 변화됩니다.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만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의 모습입니다. 반면,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나와 같은 고통으로 아파하는 다른 사람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자기 아픔을 해결하려는 바람 이상으로 타인의 고통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게 될 때는 서원으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픔의 극복을 개인적인 한으로 끝내지 않고, 한(恨)의 사회화로 승화하는 그 밑바탕은 바로 더 아픈 사람의 처지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마음, 즉 보살의 서원인 것입니다.
나도 가끔 중생들에게 보살행을 잘 실천하고 살았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곤 합니다만 그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먹물옷을 입고 불제자가 된지도 60여년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벌써 여섯 번이나 바뀔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거의 매일 법주사를 다니시며 불공을 드리고 집에 오셔서도 맞이재를 지내실 정도로 불심이 돈독하신 할머니를 보고 자란 영향 때문인지 내 출가는 집안의 반대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행자 생활 때부터 은사스님은 신도들에게 하심(下心)과 올바른 회향을 강조하셨어요. 무릇 중이란 신도들의 시주밥을 얻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공양이나 다과도 신도들이 다 먹은 후에 먹도록 가르치셨어요. 또 사찰에 들어온 삼보 역시 신도들의 피와 땀이 묻어 있는 것이므로 근본 마음을 헤아려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 주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스님 또한 항상 이를 실천하셨지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신도 두명이 은사스님을 마곡사로 찾아 왔어요. 방으로 스님을 찾아오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따뜻한 아랫목을 내주시더라구요. 그때 나는 다짐했습니다.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늘 신도들을 살피며 그들 아래에서 살아가겠다고 말이죠. 이 두 가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인지….
출가하고 가장 먼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복지 사업이었습니다. 무량사 주지로 있을 때 사찰내에 광제원이란 고아원을 만들었지요. 그 당시가 1951년 6·25 난리통이라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나를 믿고 살아가는 고아들을 위해서 1백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탁발을 했지요.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찰 재정이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계에서도 복지 단체가 꽤 많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구요. 하지만 다른 종교에 비하면 우리 불교는 복지 단체와 사회 시설들이 턱없이 많이 부족합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 한파로 거리를 해매는 노숙자나 실직자들에게 잠자리나 따뜻한 공양 한끼를 대접할 수 있는 보시행이 절실한 때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불국토 건설은 따로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는 평소 신도들에게 참선보다는 염불을 많이 하길 권합니다.
염불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이름에 마음을 끊임없이 집중 시키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이라는 말에서 염(念)은 단순한 생각이 아닌 ‘집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로 마음을 집중시켜 번뇌와 망상을 없애고 일체의 고통을 소멸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염불의 참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염불은 그저 불보살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되뇌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교 수행의 요전이라 할 수 있는 <능엄경>을 보면 염불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대세지보살이 아뢴 부분이 있습니다. 대세지보살은 염불하는 중생을 극락 정토에 태어나도록 큰 용맹심을 일으켜 주는 보살이지요.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염한다면 현생에나 내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을 볼 것이며,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해 어려운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 참마음이 열리니, 향수를 바른 사람의 몸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염불 수행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잘 나타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 이는 우리 모든 불자들이 신명을 바쳐 추구해야 할 과제이며 성취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는 많은 경전중에서 <지장본원경> 독경과 지장보살 염불을 60여년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 <지장본원경>은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이루고 계신다는 지장보살의 공덕을 찬탄한 경전입니다. 또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신다는 분입니다.
“이 수많은 세계를 다 살펴도 지장 보살이 깨달음에 이르러 구제한 중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누구든 지장 보살의 모습이나 거룩한 그 이름 단 한번만 불러도 캄캄한 지옥을 벗어나리라”고 <지장본원경>에도 나와 있듯이 나는 지장보살님께 의지하고 염불해 많은 공덕을 입었습니다.
부여 무량사·공주 갑사·원주 구룡사 에서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많은 불사를 해왔지요. 그런데 불사때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랐는데 그때마다 지장보살님께 매달렸더니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원주 구룡사에 있을 때 쉰 살먹은 보살이 한 명 찾아와 사는 게 고통스러운데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해왔습니다. 이유인 즉, 남편이 술만 먹고 집에 들어오면 가구를 마구 부수고 심지어는 그것을 말리는 자신과 아들한테도 손찌검을 서슴치 않는다는 겁니다. 자식들이 어렸을때는 아이들을 위해 그럭저럭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참겠다는 거예요. 나이 먹어 이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창피해서 남들에게 얘기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나를 찾아 왔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그랬어요. 오늘부터 절에도 찾아오지 말고 아침 저녁으로 가족들 보는 앞에서 지장보살 염불을 열심히 하라고요. 그 보살은 108일, 324일 자신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 죽기 살기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했습니다. 처음에 이런 행동을 하는 그 보살에게 남편은 귀신이 씌웠다고 염불하지 못하게 염주를 집어 던지기 까지 했지요. 하지만 그 보살은 개의치 않고 염불 정진을 묵묵히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터인가 집안에 들어서면 항상 들리는 염불 소리로 인해 남편 행동에 변화가 옴을 느꼈답니다. 염불 기도를 시작한지 5년째 남편이 밤에 들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보살에게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답니다. 술을 먹을때마다 부인의 염불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쳐 괴로웠 다는 말을 했대요. 염불의 공덕으로 가정의 행복을 되찾은 가피를 입은 셈이지요.
산에 올라갈때는 하나의 길을 택해 올라가지만, 산 정상에서 보면 모든 길이 다 보이고 다 통해 있음을 알 듯 10만 부처님이 한 부처님이요, 한 부처님이 10만 부처님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우선 하나의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고집하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그 대상을 정해야 합니다. 한 부처님의 명호에 끝까지 의지하고 명해야만 그 부처님과 만나게 되고, 그 의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 일체의 부처님을 동시에 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불보살은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불보살이란 결국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끝없는 은혜이시고 걸림없는 의지처이시고 무조건의 대자대비인 것을 굳게 믿으며 이를 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심 염불하면 마음에서 일체 형상을 취하지 않고 큰 원을 세우고서 정진하게 됩니다. 정진해 나감에 따라 그동안 자신에게 쌓였던 모든 업장과 미혹들이 차례로 사라져 망념에서 벗어나게 될 때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망녕된 업의 흐름을 차단하는 길은 원력이 깃든 불보살의 명호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생기고 사라지는 온갖 마음들은 하나의 불보살의 이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이름 하나로 모든 마음을 꽉 채우면 번뇌가 일지 못하게 하고 일체의 사량분별이 끊어지게 됩니다.
일체처 일체시(一切處 一切時)에 어떤 사람이 지장보살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먹는 것이고 잠을 자도 내가 자는 것이 아니라 ‘지장 보살’이 자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모습은 눈이나 귀를 통해 볼 수 있는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마음안에서 드러나는 깨달음의 큰 지혜 광명이며 자비이지요. 그래서 참되게 염불하는 사람은 절대로 요행스런 기적이나 신통 등 외형적 가피를 구하지 않습니다. 돈 생각이나 복을 받으려는 생각보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하고 간절하다면 부처님은 불자들 앞에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열심히 염불하십시오.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염불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결국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여길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 준다고 할 때 상대가 느끼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상대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경우 자기 생각에 맞춰 행동하기 쉽습니다. 즉 중생은 자기 중심에 집착해 자기 생각대로 상대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자신에게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하지요. 만약 이와 같은 형태로 구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배 형태를 가져 오는데에 불과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아픔은 훨씬 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푸는 행위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랑에 비하면 좁은 사랑의 표현에 불과 합니다. 아픔을 기반으로 한 사랑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픔을 겪거나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아픔을 마치 자기가 겪은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중요 하지요.
‘저런 처지에서 얼마나 아프겠느냐, 내가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참 미안하다’는 마음만 있으면 설령 도와주지 못해도 무량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꼭 재물로만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재정 형편이 안될 때는 마음이라도 함께 아파하며,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수행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