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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매사 격식보다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차도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찻잔에서 차의 종류, 그리고 마시는 법도까지 다 그렇습니다.
내가 마시는 차
저는 다기를 갖추어 쓰지 않습니다. 세트를 한번 써 본 적이 있는데, 좀 번거롭고 형식적이다 싶어 작파했습니다. 대신, 널찍한 대접 위에 쇠로 된 거르개를 걸쳐 놓고, 거기 차를 얹은 다음, 전기 포트에서 끓여낸 물을 붓습니다. 간편하기 이를 데 없지요.
제가 쓰는 찻잔은 좀 독특합니다. 다기용 찻잔은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몇 번씩 나누어 마셔야 하는데, 늘 그게 좀 번거롭고 감질났습니다. 그렇다고 커피용 머그잔은 너무 크고 위압적(?)이어서 불만이던 차에, 그 중간 크기의 컵을 광주 도자기전을 돌다가 발견하고, 이거다 하며 환호했습니다. 높이는 머그의 반쯤이고, 찻잔의 두 배쯤입니다. 이 컵의 묘미는 바닥은 편평하고 입구가 두툼한데 있습니다. 마시기도 좋고, 씻기도 너무 편합니다. 커피를 마셔도 좋고 녹차를 따라도 좋습니다. 손이 쏘옥 들어가고 품이 넉넉하니 헹구어내는데 용을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이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좀 널리 일반화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차를 좀 잡스럽게 마십니다. 연구실 책꽂이의 폭이 넉넉하여 거기 여러 차를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산 것도 있고, 누가 준 것도 있습니다. 둘러보니, 세계 차의 작은 박람회 같습니다.
아, 참, 화엄(華嚴)의 본래 이름이 잡화(雜花)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이 있나요. 화엄경(華嚴經)은 본래 잡화경(雜花經), 즉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게 좀 상스럽고 품위가 떨어진다고 이름을 바꾼 모양인데, 저는 이 폭거(?)를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체가 평등(平等)하여 높낮이가 없는 판에, 매난국죽(梅蘭菊竹), 귀하거나 품위 있거나 우아한 꽃이 따로 어디 있겠습니까. 저마다 저 나름대로 피고, 그 핀 자태와 향기가 모여 한바탕 축제를 이룬 잡화엄식(雜花嚴飾)이 이 세상의 풍경임을, <잡화경>은 웅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못났다 하여 기죽지 말고, 없다 하여 절망하지 말고, 잘났다고 뻐길 것 없고, 있다고 교만하지 않는 삶을 이루십시오.
서가에 늘어선 잡차(雜茶)들, 거기 특별한 명품은 없습니다. 학생이 준 유기농 녹차, 강원도산 머루차, 슈퍼에서 산 모과차, 영국에서 온 아마드 홍차, 대만 학회 갔을 때 사온 철관음과 오룡차, 중국 학자가 준 재스민과 보이차가 있습니다. 커피도 일회용 믹스와 카푸치노에, 필터로 걸러먹는 차에, 설탕 크림에 타먹는 분말 커피도 있습니다.
손이 주로 가기는 녹차와 커피이고, 나머지는 별식으로 마십니다. 무엇을 마실지 정해둔 바는 없습니다. 마음이 안으로 향할 때는 고즈넉한 녹차가 좋고, 마음이 사람들과 더불어 있을 때는 찐득한 커피가 좋습니다. 비가 내리거나 우울할 때는 따뜻한 커피가 좋고, 날씨가 덥고 회의가 길어지고 잡생각이 많을 때는 차가운 녹차가 좋습니다. 한문에 젖을 때는 녹차에 손이 가고, 영어를 따라갈 때는 어느새 커피를 타고 있습니다.
커피도 녹차도 굳이 고급을 찾지 않습니다. 너무 저급하여 맛이 탁하지 않으면 좋습니다. 너무 비싼 차는 부담스럽습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맛이 너무 섬세하면 부러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렇지만, 차도 거칠고 투박한 맛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녹차 가운데 제가 제일로 치는 것은 설록차 억수입니다. 억수는 색깔이 좋습니다. 너무 많이 우러나 진하지도 않고, 너무 엷어 밋밋하지도 않습니다. 그 비취빛 색깔이 심산의 맑은 연못 같아서 별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맛도 재스민처럼 화려하거나 풍만하지 않고, 오룡차처럼 둔탁하고 무겁지 않습니다. 그 맛은 약간 떫고 터프하면서도 달고 시원합니다.
억수보다 위로 가면, 떫고 터프한 맛이 줄어들고, 그보다 아래로 가면 달고 시원한 맛이 떨어집니다. 거기다 금상첨화, 가격도 적절하고, 구하기에 까다롭지 않습니다. 껄, 주머니 사정이 그 정도인데, 저도 잘 모르는 소리를, 고상하게 헷갈리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빈 마음으로 우려, 빈 마음으로 권하는 차
저는 차를 마시는 법도도 까다롭게 따지지 않습니다. 매사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요. 주인된 사람은 손님이 차를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차 맛을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마음을 나누는데도 그렇습니다.
주인이 다도를 운운하며 까다롭게 따지면, 차 맛이 저만큼 달아나 버립니다. 그럴 땐 단숨에 한 잔을 들이키고는 더 이상 찻잔에 손대지 않습니다. 차가 얼마나 귀한 것이냐든가,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다든가, 찻값의 고하를 들먹이기 시작하면 차가 묵직하게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습니다. 차의 이력을 줄줄이 꿰며, 옛적의 다인들의 행적을 늘어놓으면, 차 맛을 느껴야할 신경이 귀로 이동해버립니다.
차에 ‘관한’ 얘기는 입맛을 돋울 정도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식을 자랑하거나 차별을 두려는 권위의식이야말로 차 맛을 버리는 원흉 아닐까요. 아, 그 ‘정보’와 ‘권위’ 사이의 경계가 말의 다과(多寡)에 있지 않다는 것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말을 아무리 해도 번잡하지 않을 때가 있고, 한 마디 말도 덜컥 너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 섬세한 차이는 역시 ‘마음’에 있다 싶습니다. 그 경계를 이거다고 말로 짚어주기는 어렵지만….
조주 스님에게 객승 하나가 와서 물었습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차 한 잔 들게(喫茶去).” 너무 자주 들어 식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계사 옆 찻집 하나가 이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끽다거’, 아 참, 여기 거(去) 자를 심각하게 해석해서, “차나 한잔 하고 가지”라고 새기시는 분이 있는데, 이 글자는 동사의 방향을 일러주는 보조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차를 마시기 위해서 찻잔 쪽으로 뻗는 손을 함축하고 있다고 알면 대충 비슷합니다. 정통 한문에서는 어림도 없는 용법이지만, 당송 이후의 구어체와 거기서 발전한 현대 중국어에서 빠질 수 없는 글자입니다.
신선이 마시는 감로
어쨌거나,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말 너무 쉽겠습니다. 너무 쉬울 것 같아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분노와 슬픔을 타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가 드물고, 내 에고와 권위를 타서 차를 권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차를 ‘빈 마음’으로 우려, 빈 마음으로 권할 때 거기 모든 것이 있습니다. 공(空)이라, 무심(無心)은, 당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의 불순물로 탁하게 오염시킨 차를 뻔뻔스럽게 내놓고 있다는 파렴치를 알기만 하면, 차 맛은 훨씬 좋아질 것이니, 그 감로수를 마시는 사람은 단박에 신선이 됩니다.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