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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들으려고 나를 그렇게 따라 다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이른 아침, 부산을 출발해 오후 1시가 넘도록 스님 뒤를 졸졸 따라 다닌 셈이었다. 통영 연화도 연화사에서 고산 스님의 법회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따라 나선 길. 그날따라 전날 내린 눈으로 길은 얼어붙고,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부산을 출발했지만 차들은 거북이걸음을 하고,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제 맘대로 미끄러지는 차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평소 3시간이면 충분한 통영까지 5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이제 연화도행 배를 타는 것만 남았는데…
바다 가운데 회오리가 불어 배가 뜨지 않는다는 전갈이었다. 연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미래사로 향한다는 스님 뒤를 따라 미래사로 향하던 길, 다시 목적지가 용화사로 바뀌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곧장 차머리를 용화사로 돌려 오후 1시가 훌쩍 넘어서야, 스님께 인사를 여쭌 것이다.
“스님, 참 어렵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요. 어떤 일이든 쉽게 이룬 일은 쉽게 어그러지고, 어렵게 이룬 일은 파괴가 잘 안 돼요. 모든 기도나 공부도 마찬가지로 어렵게, 어렵게 해야 성공의 바탕이 단단한 거예요. 오늘도 잘 들어갈 건데, 시련을 한번 겪게 하는 것이지.”
짧은 반나절, 고산 스님께 법문을 듣기 위해 나선 여정에서 불현듯 서역으로 진리를 구하러 떠났던 옛 선지식들의 머나먼 구도 여정이 떠올랐다. 교통수단조차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진리를 찾아 떠났던 선지식들 중에는 그 먼 여정에서 중도 포기하거나 목숨을 잃었던 구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는 신심으로 목숨을 걸고 지켜내고 이어왔던 법의 흐름이 이 시대 우리의 길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리라. 거기에 생각이 닿자, 앞서간 선지식들과 현 시대를 지켜가고 있는 선지식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고산 스님을 뵙는 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으로 다가왔다. 스님께서 주로 주석하시는 부산의 혜원정사에서 뵈었다면 결코 느껴보지 못했을 법의 소중함, 스승의 소중함을 강풍과 눈길로 얼어붙은 통영행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바다길이 막혀 못가고 만 통영 연화도 연화사 불사 얘기부터 여쭈었다. 연화사는 고산 스님께서 창건하신 절이다. 한번의 법회 참석도 이리 우여곡절이 많은데, 불사하는 긴 시간동안의 어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불사는 처음부터 신심으로 하는 것이지 신심이 아니면 잘 안돼요. 15-6년 전에 처음 현지답사를 가서 3일간 민박을 하면서 전체 섬을 일주하고 3일째 되는 날에 사명대사, 연화도사 토굴터를 발견했어요. 당시 연화장 세계를 상징해서 지은 시구는 남아 있는데 어째서 절터도 하나 없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 때문에 밭 두 떼기를 사놓고 나온 것이 지금 연화사와 보덕암 창건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요.”
이후 스님은 10년에 걸쳐 2만여 평의 땅을 샀고, 3년 만에 연화사를 완공했다. 이어 보덕암 불사도 3년 만에 완공한 스님은 앞으로 연화장 세계를 염두에 둔 불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해수관음상을 모신 옆에다가 극락, 인간세계, 지옥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을 빙 둘러가면서 조성하고 상봉으로 오르는 연화로에는 부처님 일대기를 테마 조각공원으로 만들 작정이다. 상봉 옆에는 연화도인 토굴터를 복원해서 동상을 모시고 그 옆에는 사명대사 토굴터도 복원해서 사명대사 동상도 모시게 된다.
스님이 꿈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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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스님은 퇴락해가던 하동 쌍계사를 정부보조금 하나 없이 20년이 걸려 중창했고, 부산 혜원정사, 부천 석왕사, 통영 연화사를 연달아 창건했다. 스님이 마음을 먹고 시작한 불사는 반드시 성사됐고, 수많은 대중들이 운집하는 가람으로 자리 잡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을 한문 그대로 아침마다 외워요. 72-75년 조계사 주지를 할 때, 내가 발원문 하는 소리를 듣고 신도들이 눈물을 지었을 정도로 지극하고 간절하게 발원을 해 왔어요. 그 발원문 중에 큰 법당을 처처에 세우고, 마구니는 있는 대로 파(破)하고,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시방세계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내용이 나와요. 어릴 때부터 그 원력을 세워서 수행을 해 나왔어요.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다운 참다운 스님이 되겠다는 원력으로 처음 행자 과정을 할 때 밥 짓는 것, 반찬 짓는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갔어요.”
기본을 강조하는 스님은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으로 제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스승이다. 궁중요리 책까지 섭렵하며 배운 스님의 요리 실력은 일류 요리사 수준이다. 삽이나 괭이를 잡으면 일류 신농씨라는 얘기를 듣고, 대패나 망치나 톱을 잡으면 조계종단에서 도목수 소리를 듣는다. 김천 청암사 강원에서 강사를 할 때는 스님이 직접 학생의 책상을 손수 짜서 줬을 정도였다. 통나무를 켜서 대패질을 하고 아교풀로 붙여서 서랍을 하나씩 넣어 만들었다고 했다. 아직도 그 책상이 남아 있을 것이라며 웃어 보이는 스님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온 마음을 다 기울이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일은 계행을 청정히 지키면 다 이뤄지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하듯이 계행이 바로 그 기초에 해당됩니다. 석암 스님께서 계행(戒行)을 청정히 지키면 계덕(戒德)으로서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는데, 과연 그 말씀이 맞아요. 그리고 세상일은 이뤄놓고 보면 잘한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루기전에는 시시비비가 많아요. 부처님도 6년 설산고행을 하고 또 두루 익힌 것을 종합해서 12년 수도를 해서 성불을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알아주지, 금방 가서 2-3일 만에 성불했으면 누가 믿어 주나요?”
스님은 요즘 사람들은 근기가 약해 조금만 고달퍼도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인내하며 끝까지 이루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미 부처님께서 설해 놓은 것대로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어요. 법화경, 화엄경에 보면, 이미 삼천년 전에 한자리에 앉아서 삼천대천세계의 말을 다 듣고, 가만히 앉아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물건을 다 볼 수 있다고 했거든요. 30년 전에 법문하면서 그 소리를 하니 미친놈이라고 하더니만 TV, 컴퓨터, 시디까지 나왔잖아요.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쏘옥 들어간다는 말씀이 시디의 출현으로 증명된 셈이지요. 그러니 과학자들이 진짜 제대로 된 컴퓨터를 만들려면 인간의 두뇌를 모델로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한계가 없는 컴퓨터가 바로 인간의 머리요,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의 도리를 잘 연구해서 밝혀내고 그 도리를 따르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다보면 언젠가는 불국토가 이뤄질 것이라는 게 스님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또한 스님은 불제자의 가장 핵심은 부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고 강조했다.
“누구든지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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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교를 믿든 천주교를 믿든 전체 우리 국민이 자나 깨나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이나 말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해요.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째는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하면 성공합니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나도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 공부를 했어요. 내가 고생한 것을 털어놓으면 전부 다 놀랍니다. 세상 살아가다보면 억울한 소리도 듣게 되고 마음먹은 것을 마음대로 이루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넷째로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만 잘 살아서 되는 게 아니고 자꾸 베푸는 것으로 복이 오는 것입니다. 물질로 베푸는 재보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법보시,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나 고통을 없애주는 무외시 등 내 가진 모든 것을 베풀면 앞길이 트이고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앞길은 현재 자기의 실다운 행동 하나 하나가 열어가는 것입니다.”
강풍 때문에, 얼어붙은 길 때문에 포기했더라면 결코 들을 수 없었던 고산 스님의 귀한 법문이, 부산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 뚫어놓고 있었다. 막힘없는 길, 그 길을 열어준 부처님과 선지식들께 마음의 삼배를 드리면서 돌아왔다.
▲ 고산 스님은?
70년대 초 조계사 법당 앞, 노보살들을 중심으로 데모가 열렸다. ‘신성한 법당을 노래자랑 무대로 만들 셈이냐’는 항의가 거세였다. 법당에 석주 스님을 모시고 운문 스님을 주축으로 만든 첫 찬불가를 부른 다음날 일어난 풍경이었다. 그 당시 주지는 고산 스님이었고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자고 제안한 것도 스님이었다.
“그때, 보살들의 반대가 대단했어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노래는 포교의 좋은 방편이 된다고 생각해 설득을 했죠.” 고산 스님은 부산에서도 한차례 홍역을 치루며 찬불가 보급을 시작했고 그것이 불교음악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조계사 주지 당시 연초, 초파일 때 행해지던 독불공을 과감하게 없앴다. 독불공을 참회기도로 바꿔 불자들의 기도와 정진 열기를 높여나갔다. 이처럼 앞서가는 생각과 추진력으로 일관해온 고산 스님 지금도 불교의 미래를 가꾸려는 숨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32년 울주에서 태어나 46년 출가한 스님은 강사, 율사, 선사, 법사로 쌍계사, 석왕사, 혜원정사, 연화사 등을 오가며 대중 교화의 한 길을 걷고 있다.
동산스님을 계사로 48년 사미계, 56년 비구계를 수지하고 61년에 직지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했다. 이후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조계사, 은해사, 쌍계사 주지와 조계종 호계원장,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고산 스님은 <대승기신론 강의본><사람이 사람에게 가는 길><선 깨달음의 길>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부처님 진리의 말씀을 순 우리말로 노래한 시집 <마음이 곧 부처다>를 칠순을 기념해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