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고려시대 ⑦
고려는 송조의 영향으로 차문화가 크게 융성해 이인로, 김극기 같은 다인이 나오고 불가에도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같은 이가 배출돼 문학, 종교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백운거사 이규보는 호방한 기품과 청정한 마음으로 차를 아주 즐겨 수많은 다시와 기록을 남겼고,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기풍을 조성했다. 유불(儒佛)에 두루 교유하여 고려 다사(茶史)에서 그를 빼면 맥이 끊어질 정도로 확고한 위치를 점한다. 그가 이름 붙인 유차(孺茶)는 당시에 매우 고급차였다. 그러나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궁중의 다방도 축소되고 관원도 겸직으로 변하고 신하들에게 하사하던 차의 양이나 횟수도 격감한다.
중국은 남송대에도 차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아 육유, 범성대 등의 차인이 있었으나 무역수지에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차의 값은 폭락한 반면 말값이 몇 배로 뛰어서 국익에 많은 손실을 보았다. 일본은 바야흐로 영서(榮西)가 송을 왕래하며 차씨를 가져다 심고 거리에 다점(茶店)도 생겼다.
<한국>
고려시대
2 이인로의 출생 ①
@ 김극기의 활동 ②
1159 다정 설치 ③
1167 왕이 귀법사 행차 ④
1168 이규보의 출생 ⑤
1170 무신정권(정중부) ⑥
1178 다방원 6명 감소, 진각국사 혜심 출생 ⑦
1186 무관이 내시관과 다방 겸직
@ 보조국사의 활동 ⑧
1193 <동명왕편>(이규보)
1196 최충헌의 집권
<중국>
송대
@ 장원간(張元幹), 상장(桑莊)의 활동 ⑨
1140 조여려(趙汝礪) ⑩
@ 육우의 활동 ⑪
@ 범성대, 양만리, 주운 등이 활동 ⑫
1173 세차(細茶) 수출
1177 말값이 오르고 찻값이 내리다
1190 장종의 활동 ⑬
1198 송다(宋茶) 수입제한
<일본>
가마구라
1159 평치(平治)의 난
1173 염창(鐮倉) 시대
1175 정토종(淨土宗)
1191 영서 스님 ⑭
1192 염창막부 개설
1196 다점(茶店)이 있었다
① 이인로(1152~1220)는 어려서 절에서 성장해 차를 즐겨 마셨고 다시도 남겼다.
② 김극기는 명종연간의 문인으로 초야에서 지내며 차를 즐겨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용만잡흥’은 차에 대한 심오한 정신세계를 노래했다.
③ 3월에 왕(의종)이 현화사에 행행하자 동서 양승원에서 각각 다정(茶亭)을 설치하고 어가를 맞이했다.
④ 왕이 귀법사에 행차할 때 달령다원(獺嶺茶院)에서 쉬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지방에도 다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⑤ 이규보는 의종 고종 연간의 문인으로 차를 좋아해 고려의 다사를 빛낸 다인이다. 다시문과 해박한 차정신을 남겼다.
⑥ 무신들이 정권을 잡을 후 공적 행사를 제외한 차문화가 위축되고 왕의 차 하사가 줄었다.
⑦ 혜심은 차를 사랑한 선시인(禪詩人)으로 ‘도백운암(到白雲菴)’ 등의 다시를 남겼다.
⑧ 지눌은 수선사 1세로 수많은 불적을 쌓았고 그 중 종휘선사의 선원청규에서 인용한 차에 관한 글이 <계초심학인문>에 전한다.
⑨ 장원간: 송대 시인으로 소식의 영향을 받아 다시사(茶詩詞)의 일격(一格)을 이루었다. ‘완계사(浣溪沙)’ ‘야좌(夜坐)’ 등에서 잘 표현되었다.
상장: 송대인으로 차를 즐겼으며 ‘여지광보(茹芝廣譜)’와 ‘속다보(續茶譜)’를 저술했다.
⑩조여려: 송대 다학자로 웅번의 <선화북원 공다록>을 보충하여 <북원별록(北苑別錄)>을 썼다.
⑪ 육유는 당대의 시인으로 차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졌으며 많은 차시를 남겼다.
⑫ 범성대와 양만리는 송대의 시인으로 차를 좋아해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주운은 송대 차인으로 <청파잡지(淸波雜志)>를 썼다.
⑬ 금의 장종은 차에 관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송차를 적게 수입하고 자국의 생산을 늘이려 애썼다. 7품 이하의 사람들은 차를 마시지 못하게 했다.
⑭ 영서선사는 1168년과 1187년 송에 유학하고 차씨를 가져다 심었다. 고산사 명혜상인에게 차씨를 보내 도가노차의 시원이 됐다. 그의 <끽다양생기>는 일본 최고의 다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