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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목마른 이 시대 달마가 필요하다"
김지하 달마전, 3월 2~13일 인사동 학고재서

김지하 시인 사진=고영배기자


그 언제 어디에서건 ‘타는 목마름으로’ 삶을 뜨겁게 노래했던 시인 김지하. 70년대에는 수없는 투옥을 거치면서도 불퇴전의 민주투사로, 80년대 이후에는 생명운동가로
김지하 달마 그림
그 어디에서나 늘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치열함을 보여준 김지하.

그런 그의 열정이 화선지 위에 거칠고도 익살스러운 먹의 흔적으로 남았다. 김지하 시인은 25년 동안 중국 선종 초조 달마 스님을 그려왔다. 보편화된 달마 그림과 달리 그의 달마에는 익살, 기쁨, 슬픔 등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24주간 연재되는 동안 네티즌들에게 넉넉한 웃음을 선사하며 인기를 끈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자재로 선기를 드날렸던 달마 스님을 통해 그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자신의 달마 그림을 100여 점 모아 놓고 생애 첫 달마전(3월 2~13일, 인사동 학고재)를 여는 김지하 시인을 2월 15일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왜 ‘달마도’인가

독방에 죄수를 5년 이상 가두지 않는 것은 감옥의 불문율이다. 실성을 참
김지하 달마 그림
을 수 있는 인간의 한계치를 나름대로 설정한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7년의 세월을 빈벽과 마주하고 견뎌냈다. 참선 덕이다. 엄혹한 특수 격리 기간이 5년째로 접어들던 당시, 나는 참선에 대한 책을 닥치는대로 읽은 후 수행을 시작했다.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안이었다.

80년대 초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면서 몸은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시대와의 불화는 마음의 자유를 허락지 않았다. 그때부터 난과 달마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특히 연담 김명국 선생의 달마도를 접한 이후 달마의 자유롭고 여여한 정신세계에 매료돼 먹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엄숙하고 딱딱한 달마보다는 생명력이 충만한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달마를 많이 그렸다. 계율이 엄한 절집에 도리어 우스개가 많듯이, 뭔가 까다로운 기강이 요구되는 이 시절에는 유머가 더욱 요청되기 때문이다.



달마도는 그린 이의 수행력을 그대로 담아낸다고 한다

난을 치는데 있어서 붓을 잡은 이의 마음과 붓끝의 뜻은 같지만, 붓이 그 마음을 감히 따라가지 못한다고
김지하 달마 그림
한다. 마음은 난초잎의 끝을 지나 더 깊고 크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밖으로 뻗은 난초의 끝에 다함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달마를 담아왔다. 나의 달마 그림으로 수행력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시적 언어로 끌어올리기도 힘든 마음을 묵향으로 다스려온 것은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자기수양의 한 방편이 됐다.



선종의 초조 달마 스님을 그린 달마도에서는 맑고 강한 기운이 느낄 수 있다. 25년 간 생명 운동을 이끌어 온 시인의 사상과 ‘달마도의 氣’는 상관관계가 있을까.

달마도 자체의 맑은 기운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일필로 뻗은 붓질 자체, 먹 안의 비백(飛白) 안에는 그린 이의 기운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영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영성과 내가 강조해온 생명은 둘이 아니다.



얼마 전, 생명ㆍ평화 운동의 맨 앞에서 대안 이론을 모색해오던 부담을 벗고 시인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하겠노라 선언했다.
김지하 달마 그림
최근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연재한 24편의 달마 그림과 화제(畵題)에 대한 소고 역시 그 활동의 일환인 듯하다. 연재된 그림과 글에는 생명 사상에 대한 불교적인 이해가 돋보였다. 시인이 말하는 ‘생명’과 ‘불교’는 어떻게 닿아있나.


최근 생명과 환경을 논하는 이들 대부분은 서양의 생태학보다는 불교에 그 소이사상을 두고 있다.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 영성 등으로 대표되는 생명의 기본원리는 곧 불교다. 한 개의 달이 비추지만 강물 위에 천 개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다양성,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상생을 강조하는 <범망경>의 네트워크 등 불교의 가르침 하나하나는 생명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래서 내가 평소 논하는 선도풍류, 동학 등의 사상을 ‘눈동자’라고 표현한다면 불교는 ‘망막’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게송 등을 인용한 화제를 보니 서산 스님 등의 선시(禪詩)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감옥에 있을 당시 서산ㆍ경허ㆍ진묵 스님 등의 선시를 100여 편 넘게 외우고 있었다. 특히 서산 스님의 “꽃이 지는데 절집은 오래 닫혀있어 봄을 찾는 나그네 돌아갈 길 모른다. 바람은 학 둥우리를 흔들고 구름이 좌선하는 옷에 젖어든다”라는 시는 요즘도 되뇌는 선시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무심한 선객의 옷자락에도 구름이 스며드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3천 명이 넘는 시인 가운데 천 이백 명 가량이 생태시인이고 그들 가운데 70%이상이 불교에 기대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평소 ‘요기싸르(요가수행자를
김지하 시인은 25년간 달마도를 그려왔다.
의미하는 yogi와 혁명위원회를 뜻하는 comminssar를 합친 말)’를 표방해 온 시인이다. 안으로는 요기처럼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밖으로는 사회적 변혁을 꿈꾸는 요기싸르의 정신을 달마 그림에 대한 소고에서 엿볼 수 있었다.


선불교는 일상적인 논리를 벗어난 어법으로 직관적인 깨달음을 준다. 화두를 담은 화제를 통해 일상의 작은 고민과 의심이 우주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려 했다. 삶과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자 하는 적극적인 진리탐구 행위인 ‘화두참구’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의 요구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집단적 참선’이 사회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얘기를 종합해 보면 참여불교와 생명 운동의 길이 둘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최근 지율 스님이 단식으로써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 중지 합의를 이끌어 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옛날 분신정국에서 “자기자신도 살리고 남을 살리는 운동이 돼야 한다”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했던 시인인데.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겠지만 속세의 상식으로 성직자의 단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듯하다. 절집 안에서의 단식은 수행의 한 방편이고, 도롱뇽을 넘어서 티끌 하나까지도 목숨처럼 여길 수 있는 것이 수행자다. 불가지론으로 빠지기 전에 불교계 내부 입장의 전면적인 검토가 우선돼야 할 것이다. 문제를 공론화시키는데 성공했던 새만금사업 관련 삼보일배 건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강신재 기자 | thatiswhy@buddhapia.com
2005-02-17 오후 2:01:00
 
한마디
기로 가면 안되거든요~
(2005-10-14 오후 7: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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