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문화 >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18. 고려시대 ⑥

고려는 송조(宋朝)에 보낸 용봉차를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함께 마시기도 했다. 송나라에서는 차뿐만 아니라 비단이나 주류, 약물 외에 기명(器皿)들도 보냈으니, 그 속에는 다기(茶器)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부터 차를 마시는 문인들이 속속 나오게 됐고, 거리에 다점(茶店)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차를 향유하는 계층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왕의 행사에는 반드시 다군사(茶軍士)가 수행하여 차 시중을 들었다.
극에 달해던 송의 차문화는 최고의 연고차 ‘용단승설’을 만든 것을 정점으로 나라의 쇠운과 함께 금(金)의 건국, 송의 남천이 이루어져 그 정치(精緻)한 기법이 조금씩 흔들리게 됐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는 고종의 차정책이나 <북원별록(北苑別錄)> 등의 다서로 보아 그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고려시대

1112 왕(예종)이 용봉차를 대신들에게 하사
1115 박경작, 이자현에게 다약(茶藥) 하사 ①
1116 청연각에서 다례행사
1117 송에서 온 용봉차와 음식, 기명(器皿)으로 잔치 ②
1125 이자현이 병들어 차를 하사
1130 노령거 등이 금에서 귀국 ③
1135 묘청의 난, 정지상의 죽음 ④

<중국>
송대

1115 금의 건국 ⑤
@ 당경(唐庚), 채종안(蔡宗顔), 증항(曾伉), 증궤(曾几)의 활동 ⑥
1120 북원공다소에서 처음으로 용단승설을 진상
1121 납차 일부에 한해서 상인거래 허용
1123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⑦
1125 요의 멸망
1127 남송의 시작
@ 이청조(李淸照) ⑧
1130 주희(朱熹)의 탄생 ⑨
1131 고종(高宗)의 차 정책 ⑩

① 서북면 병마사 박경작에게 다약을 하사했다. 9월에 이자현에게도 다약을 하사했다.
② 왕족와 양부가 청연각에서 송에서 온 계향어주, 용봉명단 및 과일과 좋은 그릇으로 잔치하고 서대와 의복을 하사했다.
③ 노령거가 귀국할 때 은그릇과 다포(茶布) 등을 가지고 와서 올렸다.
④ 정지상은 인종년간의 사람으로 ‘백률사 서루에 붙여’라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차를 즐겼다.
⑤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 왕조는 차의 자급(自給)을 꾀하는 한편 송다(宋茶)의 수입을 줄였다.
⑥ 당경: 송대인으로 상청태평관(上淸太平官)을 지냈다. 차를 즐겨 ‘투다기(鬪茶記)’를 썼다.
채종안: 송대 다인으로 ‘다산절대(茶山節對)’ ‘다보유사(茶譜遺事)’를 저술했다.
증항: 송대인으로 ‘다원총록(茶苑總錄)’을 저술했다.
증궤: 송대 시인으로 차를 즐겨 <다산전(茶山傳)>을 찬수하고 ‘상건명이수(嘗建茗二首)’ 등의 다시를 남겼다.
⑦ 서긍: 조문사절로 개경에서 온 송대인으로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을 저술했다. 그 안에 고려차와 다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⑧ 이청조: 송대 여류문인으로 항주, 월주, 무주 등 일대를 돌며 차를 즐긴 전문가였다.
⑨ 주희: 송대 무원사람으로 아버지 주송(朱松)도 차를 즐겼고 주자도 좋아했다. 그가 자란 곳이 차의 고장 무이산 지역이니 자호를 ‘다선(茶仙)’이라 했다.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거해 유가의 다례가 행해지게 된다.
⑩ 고종은 차의 세금이 국가 중요 수입원이었으므로 강회(江澮) 지역의 차와 소금 관리를 두는 등 뇌문정을 시켜 노력했으나 다농들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5-02-17 오후 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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