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이 우리 사회에 ‘생명’을 말하기 위해 곡기를 끊은 지 2월 3일로 100일째. 지율 스님의 간절한 호소가 요지부동이었던 정부를 움직였다. 2003년 2월 경부고속철 천성산 관통 백지화 공약 이행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이후 네 차례 단식을 하며 천성산을 살려달라고 외쳐온 지 꼭 2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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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을 감췄다가 1월 31일 정토회관에서 모습을 드러낸 지율 스님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을 통해 건강을 염려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 종회의장 법등 스님, 길상사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이해찬 국무총리, 오영교 행자부장관, 강동석 건교부 장관 등 종교계 성직자들과 정부 고위관계자들도 줄이어 정토회관을 찾았다. 2월 3일 저녁 타결안이 나오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극적인 타협이 이뤄지긴 했지만 지율 스님이 10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며 세상을 향해 ‘생명’ 이라는 화두를 던진 이유, 정부의 무책임한 행태는 두고두고 되새겨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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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 드러나도 ‘국책 사업’만 강조=단식 100일째던 2월 3일까지도 정부는 ‘국책 사업의 중요성’만을 역설했다.
이해찬 총리,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 곽결호 환경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 당국자들은 “지율 스님의 단식은 안타깝지만, 국책 사업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또 “환경정책이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선례를 만들 수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에 발표된 법원의 새만금 사업 조정권고안처럼, 수많은 문제점이 드러난 천성산 터널 공사도 과감하게 재검토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불가’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지율 스님이 단식으로써 강변하고 싶은것은 무엇보다도 천성산 환경영향평가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습지와 동식물은 1994년 당시 환경영향평가에 누락됐으면 2002년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당국자들의 약속파기다. 2002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 대통령은 부산을 찾아 경부고속철도가 천성산과 금정산을 관통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에 따라 새로운 대안노선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지율 스님이 부산시청 앞에서 시작한 1차 단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2차, 3차 단식 역시 환경부 장관을 비롯한 당국자들의 믿음을 못주는 행동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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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응방식에 문제 있었다 =불신을 키운 것은 정부의 대응방식 때문이다. 원칙과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태에서 성의있는 답변을 요구하는 지율 스님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지율 스님의 1차 단식으로 전면 재검토를 약속했던 청와대는 지율 스님과 천성산 대책위를 제외시킨 채 노선 재검토위를 신설하고 ‘기존노선강행’이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2차 단식을 부른 일방적 약속 파기였다.
이어 ‘도롱뇽 소송’이 시작됐지만 정부는 재판 중인 사건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지율 스님의 3차 단식을 부른 또 다른 형태의 기만이었다. 3차 단식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러자 정부는 다시 공사를 중단하고 전문가 공동조사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합의서에 서명하기가 무섭게 독자적으로 천성산을 둘러보고는 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다시 공사를 강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처음에는 뜻을 같이했던 일부 환경단체들과 시민단체들도 지율 스님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지율 스님은 정부는 물론이고 환경단체마저 불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됐고 지율스님은 백일간의 초인적인 단식에 돌입했던 것이다.
생명 던져 생명 살렸다
총 241일간의 단식으로 ‘요지부동’ 정부 움직여
“티끌처럼 낮아지고 가벼워져야 제 원력도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천성산과 함께 한 모든 인연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거두어주소서.”
타협안이 마련되기 하루 전이자, 4차 단식 100일째를 하루 앞두었던 2월 2일. 지율 스님이 자신을 찾아 온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에게 건넨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대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세상은 지율 스님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율 스님만의 독백이 아니라 온 생명의 울부짖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천성산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2003년부터 합의에 이른 2월3일까지 네 차례, 모두 합쳐 241일간의 단식을 해 온 지율 스님은 결국 천성산과 함께 새 생명을 얻게 됐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려놓으며 버틴 시간들.
도대체 무엇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지율 스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려고 했던 것일까.
지율 스님은 단식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바위를 깎는 포크레인 소리에 묻혀 작게 들리기는 했지만 또렷이 들었습니다. ‘거기 누구 없나요? 살려 주세요…’라는 소리가요. 어린 아이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늙은 어머님 신음 같기도 한 소리였지요.”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이 아름답다는 천성산. 98년 천성산 내원사로 들어가 참선수행을 하던 지율 스님은 2000년부터 산을 지키는 ‘산감’ 소임을 맡았다. 그 뒤 천성산을 오르내린 것만도 400여 차례. 누구보다도 천성산을 잘 아는 지율 스님으로서는 망설일 것 없는 선택이었다. 지율 스님의 ‘생명평화’ 실천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고통스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단식 도중 밤늦은 시간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들처럼 살면 안되겠느냐”며 흐느끼는 목소리에 눈물이 핑돌았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단식도, 주위의 냉담한 반응도 아닌 혈육의 정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 그만 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성산이 울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율 스님의 단식을 환경문제로만 생각한다. 지율 스님 하면 천성산이라는 등식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어디 그것뿐일까.
지율 스님은 외로웠다.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극히 적었다. 어떤 이들은 단식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대해 이의도 제기했다. 거기에다 국가라는 권력과 개발요구라는 거대하고 엄청난 현실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지율 스님은 타협하지 않았다. 천성산의 뭇 생명을 살리겠다는 굳은 의지, 그것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수행자의 다짐이었다. 지율 스님은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권력과 힘의 논리에 때로는 빠져들고, 때로는 모른척하는 일부 환경단체들에게는 가슴 속 짐으로 지고 갈 멍에를 남겼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부고속철 천성산 관통을 백지화하겠다는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렸었다. 이후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사를 중단하고 환경영향을 재조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마저도 일방적으로 파기했었다.
그런 정부를 보면서 지율 스님은 천성산을 지키겠다는 천성산과의 약속이자 자신과의 약속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행자는 정직해야 된다고, 그것이 진정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지율 스님의 단식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되묻는다. 환경의 소중함, 인간의 순수성, 정직함. 이런 것들을 한 데 묶으면 결국 ‘우리네 삶’이다.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율 스님은 말없이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지율 스님은 늘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추구하는 것을 보라”고 했다. 그것은 ‘나’를 떠나 ‘모두’를 보라는 애끓는 절규다. 지율 스님은 생명·평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성찰을 이끌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