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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선생(1917~1995). 겨레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음표로 그어 올려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였지만,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서 ‘상처입은 용’이 되어 승천했다.
2005년은 윤이상 선생이 서거한 지 10주기가 되는 해다. 그는 40년간 작품을 만들며 현대음악의 역사를 때때로 갈아치웠지만, 한국땅에서 쓰는 그에 관한 역사는 이제야 닻을 올린다. 이 땅의 문화예술인들, 세계의 지식인들, 그리고 생전 선생과 인연이 깊었던 각계의 뜻있는 분들이 함께 모여 오는 3월 ‘윤이상 평화재단’의 이름으로 선생의 위업을 기리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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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과 민족정신을 음악세계로 끌어올린 윤이상 선생의 음악과 불교, 민족 세 가지 테마를 통해 지금 우리 앞에 다시금 대두되고 있는 그를 조명해 본다.
▽ 윤이상과 음악
윤이상에 따르면 유럽의 음악은 ‘조립’되고 동아시아 음악은 ‘흐른다’고 한다. 서양음악에서는 하나의 음이 멜로디 속에서는 수평으로, 하모니 속에서는 수직으로 무리를 이룸으로써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동양음악은 다르다. 개개의 단음이 음악적 현상으로 고유의 생명력을 갖기 마련이다.
교향곡을 포함해 총 150여 곡을 남긴 윤이상의 음악에는 생동하는 단음이 거대한 사상의 깊이를 아우른다. 윤이상은 “내 작품은 어느 것이나 내 음악세계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작은 음형이라도 모두 작품 전체의 기본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을 오선지에 그대로 옮겼다. 오페라 <심청>이 그러했듯 그의 작품 곳곳에 그 옛날 음악적 영감을 줬던 고향 통영의 앞바다가 스며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같은 바탕 위에서 ‘동양적 의미성을 서양음악의 수법을 빌려 표현하는 양양성(兩洋性)’을 살렸다. 그는 불교, 도교 등의 동양적 정서에서 곡상(曲想)을 얻었지만, 서양 현대의 작곡기법과 악기의 도움을 빌어 음악화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동아시아 음의 관념이 살아있어 홍은미(서울대 음악대학)교수는 “악보에 난무하는 수많은 음표들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단아함, 즉 정중동(靜中動)의 신비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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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과 불교
윤이상 선생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으로부터 청공이라는 법명을 받은 윤이상 선생은 자신을 지탱하는 동양적 사고의 핵심에 불교를 안치하고 그것을 작품세계에 투영시켜왔다.
<오 연꽃 속의 진주여!>(Om mani padme hum)는 그 대표적인 예다. ‘옴 마니 파트메 훔’은 산스크리트어로 관음보살을 염하는 말로, 윤이상 선생은 불경으로 된 가사에 곡을 붙였다. ‘연꽃’ ‘고타마에게 묻는다’ ‘갈증’ ‘해탈’ ‘열반’ 총 5악장으로 되어 있는 이 곡은 소프라노인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 소리, 바리톤의 스승이 대답하는 소리, 합창이 찬동하는 ‘모든 살아있는 자’의 기도하는 소리로 구성돼 있다. 독일의 저명한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어릴 적 고향에서 들었던 스님의 불경소리와 목탁소리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하는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한 뒤 “나는 이 작품을 쓸 때 무척 행복했으며, 이 작품을 쓰는 일은 나에게 가장 친밀한 세계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고백했다.
베를린라디오방송국에서 관현악곡의 작곡 위촉을 받아 작곡한 <바라>에서는 삼매의 고요함과 법열의 긴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바라’는 승무에 사용되는 악기 이름으로, 그는 동양 악기의 소리를 플루트의 장식음, 북의 연타 등 서양의 기법으로 완벽하게 복원해 호평을 받았다. 이밖에도 불교전통음악인 범패를 소재로 만든 <나모> 등도 불교적인 정서가 녹아든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음악으로 메꿀 수 없었던 삶의 허기를 불교로 채우기도 했다. 노년에 병마와 싸우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부처님께 기도”했고 송담 스님과의 전화통화로 심신을 추스렸다. 그리고 불교식 장례를 치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5년 78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 윤이상과 민족
윤이상 선생은 1967년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음악가와 지식인들이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누명을 씌운 사건에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선생은 2년 뒤 다시 독일로 송환된다. 그리고 95년 눈을 감을 때까지 고국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윤이상 작품에는 ‘민족’의 문제가 하나의 테마로 제시된다. 광주 민주화 투쟁을 배경으로 한 <광주여 영원히>, 분신을 주제로 삼은 그의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싸인 천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독일의 언론이 보도한 대로 그는 현실문제를 껴안으면서도 정치적 선동으로 떨어지지 않았기에 음악적 순수성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범민족 통일 음악회’를 추진해 1990년 서울ㆍ평양ㆍ해외에서 성공리에 회향했으며, 음악을 통한 남북교류를 꿈꾸며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윤이상 관현악단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윤이상 음악연구소는 설립 이후 20년간 윤이상 음악회와 음악연구회를 이어오며 윤이상 연구의 성과들을 쌓았다.
민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한 그의 뜻은 한국 땅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의 고향 경남 통영에서는 시 주최로 2000년 이래 윤이상을 기리는 통영음악제를 열고 있으며, 그를 계기로 한국 음악계에서도 윤이상 관련 학술대회 및 음악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윤이상 평화재단은
윤이상 평화재단 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원택 황석영 이강일ㆍ이하 추진위)는 윤이상 서거 10주기를 맞아 1월 11일 대표발기인 모임을 갖고 2월 22일 전체 발기인 대회를 거쳐 3월쯤 재단을 공식 출범시키기로 결의했다.
98년 이후 조국평화통일협의회를 주축으로 한 ‘윤이상 명예회복추진위원회’의 활동을 이어받아, 명예회복 운동은 물론 위대한 예술가이자 평화통일 운동가였던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고 기리려는 목적에서다.
추진위는 일차적으로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과의 대담을 기록한 ‘상처입은 용’을 재발간하고 이를 영화로도 만들기로 했다. 이미 LJ영화사와 구두합의를 끝냈고 3월경 제작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윤이상 선생이 직접 설립한 평양의 ‘윤이상 관현악단’ 초청 공연도 올해 중에 성사될 전망이다. 현재 미망인 이수자 여사의 방문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실무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와 함께 윤이상 작품을 주제로 하는 크로스오버 대중콘서트를 기획, ‘윤이상 평화콘서트 전국투어’를 추진하는 중이다.
이밖에도 서거 10주기를 기념해 국제 심포지엄과 독일-일본-한국 연주자들로 구성된 기념 음악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던 윤이상-이응노-천상병 3인 작품전 등을 추진한다. 이후 중장기 계획으로는 윤이상 작곡상 제정, 윤이상 장학사업회 설립, 윤이상 오페라 전곡 제작, 윤이상 예술학교 건립 등도 준비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