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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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 마음공부에 있다"
기획연재 <길을 묻는 이에게>



정기법회(1993. 8.15)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자리에 하게 된 것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가 와서 여러분이 안 오실 줄 알았더니 가죽 속에 물이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하고 이렇게 오신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산천초목과 더불어 우주 전체가 한마음으로써 둥글릴 수 있는 능력을 다 가지신 것 같습니다. 참 감개무량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죠. 비하고는 관계없는 말이지마는, 어느 집에 초상이 났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집은 `저 사람은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거야.' 그러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은 `뭐 보나마나 지옥 갔을 거야. 잘 죽었어.'하고 쑤군대거든요. 그게 무슨 까닭일까요? 우리가 한 철 살면서 부드러운 행, 정직한 마음, 포괄적인 마음,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조건없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 상대와 부딪치지 그렇지 않다면 부딪칠 리가 있나. 그러니 모두 내 탓이지, 하고 돌릴 수 있는 마음. 우주법계에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두루하기 때문에 조건없이 사랑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조건없이 일체 제불의 마음의 능력이 각자 여러분 앞에 같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서 이 세상에 모습을 버리고 떠났다 하더래도 영원히 세세생생에 여래의 집에 뜻을 같이 하고 우주 전체에 같이 돌아갈 수 있는 불바퀴의 생산처가 되기 때문에 한마음 법을 배우는 여러분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데 합쳐서 중용으로서 잘 하시길 바랍니다. 일체 생활 속에서 도를 구하는 거지, 내가 아니고 생활이 아니라면 도가 어디 있습니까.

옛날에 무술하는 사람들이 신검을 만들 때도 그렇고,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려면 혼을 쏟아서 포괄적인 마음으로서 정성을 다 해야만이 기술자가 되고 신검을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신검은 모든 사람을 건지고 살리는 데 쓰이는 신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중심이 신검으로써 이 세상을 밝힐 수 있고, 우주 전체를 받칠 수 있고, 또는 우주 전체를 굴릴 수 있는 대의적인 지혜로운 자비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자비의 칼인 것입니다.

첫째는 나의 무명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두번째는 세상만사 모두 같이 돌아가는 둘 아닌 법을 알기 위함이요, 셋째는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같이 사랑하면서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그 이치를 터득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처럼 눈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귀 달린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 몸뚱이 자체가 영원하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모두 한 데 합쳐서 서로서로 통하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바퀴입니다. 혼자는 할 수 없듯이 모두 한데 합쳐서 둘이 아니게, 빗방울이 바다에 들어가면 바닷물이지 어찌 개개의 빗방울이겠습니까. 그리고 각각의 물방울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그 소용돌이가 바로 불바퀴이며 블랙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블랙홀이라는 것은 생산이 될 수 있는, 우리가 모습을 변화해서 다시 태어나 발전이 되고 진화되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소용돌이를 불바퀴의 소용돌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한번 울렸다 하면 생산이 되곤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꾸자꾸 바뀌어 재현이 되고 생산이 돼서 영원히 그칠 바가 없이 즉 태어난다, 멸한다 할 것이 없이 영원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하게 돌아가는 그 섭리를 내 몸 속에서 모두 알아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고, 여러분이 살고, 여러분이 주고, 여러분이 망하고,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고, 여러분이 잘하고 못하고, 여러분이 죄를 짓고 죄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시죠? 근데 말입니다. 우주의 광대한 섭리를 알아보고 산하대지에 모든 일체 생명들이 두루두루 공생하는 그 자체를 알려면 내 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했다, 내가 산다고 이러시지만 모두 공동체입니다. 왜 공동체냐 하면 몸속에도 여러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이 종점이요, 종점이 시발점이라고 한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수억 겁 전 미생물로부터 수없는 진화를 거듭거듭 해서 인간까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인간까지 진화돼서 온 이 모습이 자기를 진화시켜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속에 어떠한 자기가 있기 때문에 온 것입니까? 이 점을 가만히 생각해 보신다면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미생물에서부터 미생물 하나가 수없는 알을 낳아서 즉 마음의 씨를 낳아서 내 몸뚱이를 진화시키고 크게 만들었으니 그 집합소에 마음의 씨가 바로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시발점에서는 미생물이었는데 종점에 가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을 종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몸속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몸속도 종점이 아닙니다. 연방 모였다가 불덩이가 한번 탁 날아서 툭 터지고 쓰러지고 또 툭 터지고 쓰러지고 이것이 우주 섭리의 작용입니다. 태양도 그렇고 모든 자체가 상대와 상대가 작용하는 겁니다. 사대가 툭 터져서 보면 마음의 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한 알의 석류 안에 씨앗이 많이 들은 것처럼 말입니다. 석류 안에 많은 씨가 들었지만 그냥 석류라고 하듯 우리 사람도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 그 개개인의 모습과 의식 또는 생명을 따로따로 이름 부르는 일이 없습니다. 빗방울이 다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면 바닷물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몸뚱이 속에 그렇게 자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사과를 하나 먹어도 혼자 먹는 게 없습니다. 수십억의 생명들이 먹고 있습니다. 생명 속에 또 생명이 있고….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사대가 그냥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마음의 씨를 많이 해놓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이익이 없고 생산이 없으면 생명들의 모습을 형성시켜서 이렇게 해놓진 않았을 겁니다. 이 우주의 섭리에서 모든 생산을 해서 점점 불어나가게끔 한 자체가 바로 마음의 씨입니다.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쥘래야 쥘 수도 없는 마음의 씨 하나가 악업 선업의 씨를 그렇게 많이 내 몸뚱이 속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먹었다고 하지만 내가 먹은 게 어딨습니까. 그 수십억의 생명들, 모습들, 의식들이 하나가 들어가면 서로 먹고 사는데 입을 빌리고 손을 빌리고 눈을 빌리고 귀를 빌리고 코를 빌리고 이 몸뚱이 전체를 빌려서 그 생명들의 집 노릇을 하고 집합소 노릇을 하고 심부름꾼이 되고 관리인이 되어서 그걸 기릅니다. 아니 기르기보다도 그것이 바로 즉 자기입니다. 시발점에 미생물이 종점에 가서도 또 미생물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물은 위대하다고 하죠.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깨달아서 내 자생중생들이 모두 진화되고 창조가 되고 화신이 되고 응신이 돼서 천백억 화신으로 바뀌어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바로 미생물을 벗어나서 부처도 되고 법신도 되고 일체가 다 되는 법입니다. 그때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반면 전체 모두가 부처이고 약사이고 의사이고 한마음 안에서 모두가 출현을 해서 응신으로 나투게 됩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우리가 왔음을 여러분의 몸속을 보면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억 겁 광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그 몸속을 보면 바로 자기가 미생물에서 왔다는 증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왔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임신을 해서 애를 낳으면 물주머니 속에서 나오게 돼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이 또 물주머니의 어항 속에서 살고 있거든요. 어때요? 여러분이 무슨 탁 틔어진 허공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도 어항 속에서 지금 살고 계십니다. 몸속에서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사는 여러분이나 몸뚱이가 어항 속에 갇혀서 살고 있는 여러분이나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은 내 자유껏 누린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바로 마음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자생중생들 틀에서 내 마음이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항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와 뭐가 다릅니까. 거기서 마음이 벗어나야 내 몸 어항 속에서 사는 이 몸뚱이도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창살없는 감옥에서 날 좀 살려달라고 빌면서 기복으로 돌아친다면 더욱 자기 마음은 업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어항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마음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첫째 내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둘째 물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셋째 허공 즉 불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소립니다. 얼른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느라고 이와 같이 얘기하는 겁니다. 과학적으로도 그건 증명이 될 수 있는 사실이지마는 과학으로도 증명 못하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무의 세계, 즉 정신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에도 소용돌이가 있고, 허공 바람 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있고, 마음의 불 속에도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이 소용돌이를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을 넘어서야만이 우리가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하시지만 우리 생활 속에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떠나서는 도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개개인들이 다 `내가 없다'는 이런 도리를 알아야 자유인이 될 겁니다. 내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아십시오. 내 몸 속에 있는 생명들이, 모습들이, 의식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망하게 하는 놈도 그놈들이요, 돈을 많이 벌게 하는 놈도 그놈들이요, 먹는 것도 그놈들과 같이 먹는 것이니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어요. 공동체로서 공동작업을 하면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누구에게 뭐를 줬다고 하더래도 조건없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줬다고 하지만 내가 줬다가 어디 있습니까, 수십억의 내가 있는데. 어떤 거를 줬는데 내가 혼자 줬습니까? 내가 줬다 하지도 말고 내가 안줬다 하지도 말고 내가 먹었다 하지도 말고 내가 안 먹었다 하지도 마십시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가운데에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나쁜 거 좋은 거를 너무나 잘 압니다. 안되고 되는 것도 알구요. 이렇게 하면 누(累)가 되는 것도 알고 이렇게 하면 참 자랑스럽게 잘한 거다 하는 것도 알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찰라찰라 내가 되는 거죠. 아버지 노릇 할 때 내가 한 거고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한 거고 내가, 내가 하다 보니 내가 너무 많아서 무심이에요. 나는 무심입니다. 행도 이걸 했다, 저걸 했다 하니까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요? 나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금방 `아버지'하고 자식이 들어오면 아버지가 되고 `아무개야'하고 부모님이 부르면 아들이 되는데요. 이렇게 광대한 천차만별의 묘법은 아마 마음 떠나서는 없을 겁니다. 이 마음의 도리를 여러분이 잘 아신다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구나. 너무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자동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이것이 묘법인가 하지 않습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도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다면 이건 모습없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신족통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앉은 자리에서 여러분 집에 가 보십시오. 안방에는 뭐가 있고 마루 올라가는 데는 뭐가 있고 신발장은 어디 있다는 걸 다 아시죠? 마음은 이렇게 신기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눈으로 보아 온 것이나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 마음공부를 한다면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어디서 온 거를 알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그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저런 산천초목들도 서로서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사랑을 하고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주고받는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임을 기다리듯 내년 봄을 기다리며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말을 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말로써 서로 통하는데 조금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사랑이 그만 변하게 됩니다. 권태로 돌아가고 증오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권태가 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 가정에서나 이웃에서나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내가 들었을 때, 내가 생각했을 때 바로 이웃집하고도 가설이 되는 겁니다. 이건 마음의 가설입니다. 보이는 데 물질적인 가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의 가설. 그러니까 ‘아, 저 사람은 어떡하든지 일어서야 되겠지.’ 한다면 일어서게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설이 돼 있어서 불이 들어오니깐 말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하지만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 자식지간이나 마음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맡겨 놓으면 바로 스위치를 올려놓은 거와 같아요. 그래서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고 이쪽에도 불이 들어옵니다.

불 들어오는 전력은 똑같거든요. 불 들어오는 건 다 마찬가지니까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거를 잘 알아들으시고 실험하고 체험들 하세요. 이것이 바로 관법입니다. 내가 스위치를 탁 올려놓고서 지켜보는 동안이 실험이요, ‘아, 저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았을 때 체험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49년 설해서 가르쳐 주신 길은 바로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아야 내 골수, 내 마음까지도 알 수 있고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나니 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에 통하여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니 공덕의 이치를 알 수 있느니라” 하신 겁니다.

공덕과 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복’은 남이 농사지어 놓은 것을 한 솥박 주시오, 하고 얻어먹는 것이고 ‘공덕’은 전체가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빈 데를 도와주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집는 거하고 열 손가락을 한데 합쳐서 드는 거하고 차이가 얼만큼 나는지 모릅니다. 우주 삼천대천세계 즉 과거 현재 미래 전체가 돌아가는 법계를 한 손으로 들 수가 있는 것이 공덕이고 이 섭리를 하나도 모르고 급박해서 목마르면 ‘물 한 그릇 주시오.’ ‘옷 한벌 주시오.’ 하고 비는 것은 기복입니다. 빌어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똥마려우면 똥을 누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자유스런 사람으로서 살라고 이렇게 형성이 됐는데 자유인이 돼야지 않겠습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놓고 그걸 모르는 겁니다. 이름만 그렇게 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굴레에서 벗어나야 만물의 영장이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진리는 혼자만의 국한된 자기가 부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됐다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됐다 남편이 되고, 형님이 되고 아우가 되고 친구가 되고 이렇게 스스로 자동적으로 걸림 없음을 말함입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되고 ‘여보’ 하면 남편이 되는데 어디 걸림이 있습니까? 걸리는 게 하나도 없죠! 그렇게 걸림이 없이 자유스럽게 살라고 했는데,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름 해놓고 부처님이라고 이름을 해놓은 것입니다. 지장, 관세음, 문수, 보현, 칠성, 용신, 지신, 산신, 독성, 신중 이 모두가 한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노릇을 안하고 사십니까. 때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해치는 것을 보면 그냥 덤벼들어서 모두 말리지 않습니까. 그게 신장입니다. 금방 자기가 신장이 된 거죠.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저건 너무 잘못해. 저렇게 할 수가 있어?” 하고 생각을 내는 것이 법신입니다. 몸뚱이로 움직여서 확연하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화신입니다. 보신이면서 화신이며, 보현이면서 화신입니다. 화신은 바로 바뀌는 그 시점을 말하고 다 바꾼 것을 보현이라고 그럽니다.

컵을 드는 과정과 물을 뜨는 과정 그리고 물을 마시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신통이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천안통을 했다 하더라도,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을 했다 하더라도 했단 말을 하지 말라. 무슨 뜻인가?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남의 속을 잘 알고 남이 어디서 온 거를 알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하더라도 이건 도가 아니니라 하신 겁니다. 컵을 들고 물을 뜬다 하더라도 물을 떴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을 떴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 이겁니다.

심안으로 보고 심안으로 들었다 하더라도 무효고 보이지 않는데 오고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무효예요. 남의 속을 다 알고 과거에 어디서 살다 온 거를 알아도 무효입니다. 아무리 알아도 내가 먹고 줄 수 없다면 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른데 물을 떠서 줄 수 없고 떠서 먹을 수 없다면 도가 아니라 이런 소리예요. 목이 마른데 물을 뜰려고 컵을 들고 물을 떴다 해도 먹을 줄 모른다면 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갈증을 면할 수가 없으니까요. 먹지 못하면 갈증을 면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주지 못하고 자기도 먹지 못하니 이건 무효입니다.

모두들 그저 어떡하든지 돈 벌어서 살 궁리만 하시는데…. 그럼 먹고살아야지 않습니까 이러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먹을 게 지금 없잖아. 먹을 게 있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나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 입을 빌려서 심부름 해줄 뿐이지.’ 얼른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래야 된다 이겁니다.

얼마 안 있으면 입시생들이 시험 볼 때가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내 한 생각이라고 할 때 ‘한’ 하면 전체가 들어가는 거고 한마음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인공을 믿고 ‘심부름을 하려면 합격을 해야 될 거 아니야.’ 하고 거기 맡기라고 하십시오. 자기 마음의 씨는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지마는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뿌리가 있기 때문에 푸르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십시오. 알고 이해가 가야 자기를 진짜로 믿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친구이기 때문에 저 나무와 뿌리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하면은 된다더라 이러고는 ‘주인공! 되게 해주시오. 주인공! 합격되게 해주시오.’ 한다면 그것도 기복이에요. 이렇게 하면 된다더라 해 가지곤 도저히 힘들어요. 그리고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 것을 알아야 믿을 수가 있는 거죠. 자기를 지금 누가 끌고 다닙니까. 자기 운전수가 없으면 차는 그만입니다. 한 부분만 고장이 나서 파워를 일으켜도 자기 육신은 쓰러져요.

그런데 뭘 그렇게 자기라고 내세울 게 있습니까. 아니, 간장공장에서만 파워를 일으켜도 그냥 쓰러지는 사람이 뭘 자기라고 그럴 게 있느냐구요. 간장공장만 그런 게 아니라 에너지공장에서도 고장이 나면 백혈병이라 그럽디다. 그러니까 모든 병 자체가 파워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업식 속에서 파워를 일으키기 때문에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모든 건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니까 뿌리에서 흡수해서 나무로 올려 보내는 거와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자기의 뿌리인 고로 반드시 ‘너만이 해결할 수가 있다’ 하고 진실히 그렇게 믿고 할 수 있는 사람이래야 됩니다.

‘사람’하는 거는 ‘부처님’하는 거와 같아서 전체 한 데 합쳐진 것을 말합니다. 각각 개별적으로 있는 게 사람이 아니고 한 데 모여서 구성된, 형성된 것을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모든 일이 침체돼서 돌아가거나 사랑이 변해서 증오가 되거나 자식들이 어떠한 문제를 일으키고 부모 자식지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리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달이 돼서 의합하게 돌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화목해지는 법입니다. 마음을 잡아야 육체도 잡아지는 법입니다.

자기 스위치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살림을 해 나가면서 도를 구합시다. 도를 구하는 건 마음으로서 그렇게 실천을 해 나가는 데에 있는 것이고 또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켠다고 해서 말은 막하고 악을 쓰고 신경질을 내고 속을 북북 긁어주고 또는 자식들이 나가서 만약에 자고 들어온다거나 공부를 안한다거나 하더라도 너 이놈의 자식,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맡겼다고 해서 도로 뛰쳐나가게 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절대 안됩니다. 맡겨 놓고 스스로 모든 게 내 탓이로다. 내가 인연을 맺었고 인연에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부딪침이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어찌 인연이 됐겠나. 그러고선 나쁘게 안 되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맡겨 놓고 부드러운 말, 부드러운 행을 해주면서 미움 갖지 말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행한다면 그쪽까지도 불이 들어와서 자식들도 마음이 바뀌어서 아주 출중한 효자 효녀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떠나서 부처님 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없이 부처님이 어디 있으며 생활 없이 어떻게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따로 있고 우리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부처고, 부처님도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그 마음과 마음이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더불어 마음이 합한 것이 부처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부처님이지만 자기 몸속에 들은 자생중생들을 다스리질 못하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부처와 중생은 같이 있습니다. 이만 하고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 하십시오.



질문자1: 스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경계를 주인공에 믿고 놓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저희는 사회의 온갖 경쟁 속에서 분, 초를 다툴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경쟁 입찰이나 공매 등 이권이 있을 적에 내가 이득을 취하면 상대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데 자리이타의 행위에 어긋날 수도 있으며, 주인공에 믿고 놓아 욕심을 내지 않자니 사회활동에 소극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수행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불법 활용에 대하여 설하여 주십시오.


스님: 지금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다 놓으라고 하는데 이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욕심도 부려야 하는데 어떻게 다 놓겠습니까 하는 소리 같은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 몸 속에 내가 얼마나 많은데 나 혼자 한다고 합니까.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몸속에 생명들을 끌어낸 겁니다. 보세요. 혼자 한 겁니까? 돈을 버는 것도 그 생명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심부름하는 겁니다. 돈을 못 벌게 해서 굶주리게 하는 것도 돈을 잘 벌어서 잘 먹이게 하는 것도 그 자리인데 어떻게 자기 혼자 한 게 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착하게 그냥 목석처럼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되 함이 없이 하라. 네가 한 게 아니라 진짜 네가 한 거니라. 개별적인 네가 한 게 아니라 포괄적인 네가 한 거다 이 소립니다. 혼자 먹고 혼자 누리려고 한 게 아니고 공동으로서 포괄적으로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했다 하지 말고 한마음 속에 주인공이 하는 거니까 나는 심부름만 해준다 한다면 아주 악의적으로 사기질 하지 않을 것이요, 또는 버리지도 않을 것이요, 규모 있게 말하자면 중도에서 잘 이끌어 나갈 겁니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주인공은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이래도 알아듣지 못하시겠습니까. 물 한 모금 마셔도 혼자 마시는 게 어딨습니까. 내가 먹어서 똥누고 오줌누면 다들 먹고 또 내놓으면 수증기가 되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또 먹기 때문에 항상 먹으면 나오고, 나오면 서로 다 같이 먹습니다.



질문자2: 저는 부산에서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장을 좀 해서 스님께 질문을 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무의미해졌다는 걸 지금 느꼈습니다. 사실 왜 제가 이런 말씀드리냐면 저는 무신론자로서 절은 오늘 처음 와봅니다. 스님을 보고도 앞에서는 ‘스님’했고 돌아서서는 ‘중’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선원에 나가시는 분들이 사시는데 제가 거기서 감동을 느낀 게 회장으로 계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몸으로 실천합디다.

불쌍한 애를 데려다 키우는데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사람도 그동안 쭉 절에 다녔는데 절을 자꾸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 남편 돈 잘 벌고 우리 집, 우리 집이더라구요, 무조건.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종교의 의의가 뭐냐. 종교라는 거는 정치가고 교육자고 구제 못하는 마지막 커버할 영역이지 않느냐. 그래서 사실상 종교적인 회의가 왔습니다. 저는 합장하는 법도 잘 몰랐고 사월 초파일날 애들 따라 가서, 왜냐하면 절에 몇 군데 가야 된다니까 운전을 해서 여러 군데 태워다 줍니다. 가서 밥 한 그릇 먹고 오는데 사실 들어가서 절도 한번 못해 봤어요.

오늘 스님께 처음 합장 한번 해봅니다. 반복된 말씀입니다만 이론적으로 사실상 제가 질문을 참 많이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설법 조금 들어보니까 더 이상 들어보지 않고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믿고 관한다는 그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실은 마이크 잡는다는 이 자체가 외람됩니다. 왜냐하면 공부 안했거든요. 비디오 한 번 보고 테이프 하나 좀 들어보다가 집 사람이 요전을 한권 사왔길래 앞장 한 번 보고 가운데 보고 뒷장 한번 훑어보고. 책을 보기 전에도 제가 지향했던 거, 사실 제가 현재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 썩고 교육 다 썩어 가지고 마지막 기댈 곳은 종교인데 온갖 것 다 하고 그러면….

저는 언론사 생활을 20년 넘게 한 사람입니다. 하기 때문에 의심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저는 안 믿습니다. 완벽주의자입니다. 종교인도 완벽해야 되고 더욱이 스님은 완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에 사는 장사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인정해 줘야 하지만요. 그리고 저는 어릴 때 교회에 나갔었는데 찬송가는 따라서 불렀지만 염불 같은 것은 굉장히 저항을 느꼈어요. 법당은 분위기 자체가 으스스해서 마음에 안 들구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면서도 그랬습니다. 저는 성불한다 뭐 이런 욕심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오는 것이 우리가 볼 때 밑져 봐야 본전 아닙니까.

손해 보는 거 없거든요. 가산 전부 다 가지고 어디다 갖다 받치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부모나 학교나 사회교육에서 폐기된 부분이 여기 와 보니까 좋더란 말입니다. 제가 들어보니깐요. 제가 다른 사람 구제는 못해도 혼자 스스로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 아니냐. 관광도 가는데 이왕이면 공기 좋은 여기 와서 한 번 들어보고 감동을 느끼는 그 자체만 하더라도 법회 참석의 의의는 된 거 아니냐.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것이 널리 전국에 구석구석 도둑질 해 먹는 사람,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 들었으면 합니다. 저는 성불도 모르고 할 생각도 안하지만 단 내가 우리 이웃을 보니까 그 얼굴이 참 편안해 보여서 저 정도만 되면 된다 한 겁니다. 내 스스로가 다른 사람한테 욕 안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오는데 마침 제가 앉은 좌석이 제일 뒷칸이어서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그래 집 사람한테 ‘니만 가라. 나 내릴란다’ 하고 신경질을 냈습니다. 사실은 터미널이 어디 가까운 데 있으면 다른 차타고 내려가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종교는 하나 갖긴 가져야 되겠는데 갈 때부터 내하고 인연이 안 맞는갑다. 그래서 나 차라리 가톨릭이나 한번 믿어볼까 하니까 뭔가 속에 두려움이 있더라구예.



스님: 차에서 안 내리신 게 다행입니다. 밑천은 뺏으니깐요. 아주 철두철명한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에누리가 조금도 없어요. 자기가 잘했으면 잘한 대로 못했으면 못한 대로 다가오는 그 자체가 아주 정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 한 번 잘 쓰면은 구덩이에서 나오기도 하고 마음 한번 잘못 쓰면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말이 있죠. 하여튼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과 한 가지 약속할 것은 진짜로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면 반드시 이 마음공부를 하세요. 이 마음은 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됐다, 저게 됐다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구나 하는 거를 느끼고 아신다면 그대로 실천을 하세요. 가정 빼놓고 내 몸 빼놓고 무슨 종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병고가 없고 애고가 없어야만 나도 편안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기도한다고 집을 비워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 몸, 우리 가정 빼놓고 종교가 어딨겠습니까. 여러분이 사시는데 좀더 너그럽고 애고가 없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 마음공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2005-01-26 오후 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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