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4 (음)
> 종합
있는 그대로 보려면 ‘이뭣고’하라
대일 스님(마천 영원사 주지)


대일 스님은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늘 "이뭣고"를 하라고 당부했다. 굳이 출가하지 않더라도 늘 행주좌와 어묵동정하면 그곳이 바로 법당이라는 것이다. 사진=고영배 기자


대일(大日)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한지 30분가량 지났을 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스님이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하네. 당신 뜻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덜컥 취재에 응했다고 노발대발 하셨다고 하던데. 미안하게 됐어.”

대일 스님을 만나뵈라고 알려준 스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아차, 싶었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생각됐는데…. ‘스님다운 스님’이라는 말로 대일 스님을 추천해준 스님과 대일 스님 상좌스님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듯 했다. 하지만 내친걸음이었다. 승용차는 그대로 마천을 향해 달렸다.

점심도
대일 스님이 직접 법당 앞을 쓸고 있다. 사진=고영배 기자
거른 채 영원사 근처에 도착했지만 또 다른 난관이 우리를 기다렸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쌓여 걷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잠시 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는 생각에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숨이 가빴다. 조금 지나니 등 뒤로 땀도 배어나왔다. 하지만 눈으로 뒤덮인 산줄기에서 내려오는 알싸한 바람이 걷는 맛을 새롭게 했다.

영원사에 도착해 법당을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뒷짐을 지고 지나가는 한 노스님을 만났다. 대일 스님이었다. 반배 합장을 하며 인사를 드렸다.

“연락 못 받았나. 나는 신문에 나올만한 스님도 아니고… 절 구경이나 하다가 가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스님의 엄격한 눈초리에 더 이상 말을 붙일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그냥 갈수도 없고. 법당 앞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는 기자가 안스러웠던지 얼마 후 스님이 ‘차나 한 잔 하고 가소’하고 권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식해서 법문해 줄 정도로 배운 것도 없다. 요새 난다 긴다 하는 스님도 많은데 이런 데는 뭐 하러 왔어. 여기 도량이야 좋지만….”

‘도량이야 좋지’라는 스님의 말에 영원사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대일 스님은 출가한 뒤 전국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다 영원사 인근 상무주암에 10년 정도 있었다. 이후 30년 넘게 영원사에서만 주석하면서 영원사를 복원했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번지에 위치한 영원사. 전통사찰 제106호인 영원사(靈源寺)는 통일신라시대 고승 영원 대사가 건립했다고 전해져 영원사로 불린다.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합천 해인사 말사다.

영원사는 한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제일 큰 사찰로, 너와로 된 선방 9채를 비롯해 100칸이 넘는 방이 있었다.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 할 수 있는 조실안록(組室案錄)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 청매, 사명, 지안, 설파상언, 포광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 109명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건물 전체가 소실됐다가 대일 스님이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영원사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의 얼굴이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영원사를 복원한 이유를 여쭤봤다.

“꼭 불사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빈터로 있는 거 오래 살다 보니까 그래 됐지. 불사하는 체질도 아니고.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돌았다. 질문을 돌려봤다. 산이 깊을 뿐 아니라 혼자 계셔서 적적하지 않느냐고.

“먹을 양식만 있으면 되지 큰 불편은 없다. 돈이야 있으면 있는 대로 쓰면 되고. 그런데 요새 큰 절은 기업 아닌가. 관광상품화나 하고.”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이어 왜 평생 영원사에서 사는지 여쭈었다.

“갈 데도 없고 돈도 없어서 그렇지. 요새 중들 죽고 나면 남은 돈 때문에 싸우는 모양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다 신도들 시줏돈인데 종단으로 회향해야지. 또 대한민국 돈이 다 자기 것이면 뭐할 거야. 돈벌려고 머리 깎은 것도 아니잖아. 부처님 얼굴에 똥칠하는 짓이지.”


법당 앞에 선 대일 스님. 오늘의 영원사는 대일 스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사진=고영배 기자


거칠 것이 없었다. 질문하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스님은 갑자기 기독교 칭찬도 했다.

“기독교는 봉사를 잘하데. 옛날에는 하늘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니 요새는 봉사하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그러더구먼. 그게 맞는 거야. 옛날에 성철 스님도 불공은 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절 바깥에서 하는 것이라고 했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지.”

가만히 들어보니 애정 어린 불교 비판이었다.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알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커서 스님이 되더라도 수행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스님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바른 스승을 만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조선시대 여기 지리산 벽송사에 법계정심 선사라고 있었지. 여기서 감자농사나 하고 도토리를 주워 시장에 내다팔며 유유자적하게 살았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왔지. 벽촌이라고 하더라도 큰 스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거야. 그 스님이 법계정심 선사에게 ‘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자 스님은 공부할 사람이다 싶어 받아들였지.

그 후 한 3년이 흘렀어. 하루는 공부하러 온 스님이 3년이나 스님 밑에서 일만 했지 하나도 배운 것도 없고 허송세월만 보냈다 싶어 보따리를 쌌던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법계정심 선사가 떠나던 스님을 향해 주먹을 쥔 손을 치켜들며 이렇게 외쳤지. ‘이 곰 같은 놈아, 귓구멍이 뚫어지도록 가르쳤건만 모르고 그냥 가느냐. 법 받아가라.’ 이를 본 스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았던 거야. 그 스님이 바로 지암 스님이라.”

대일 스님은 요새 사람들은 참을성이 부족하다며 또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옛날에 베장사를 하던 한 총각이 고개를 넘을 때였다. 그 때 누더기를 입고 쉬고 있는 스님을 봤지. 안타까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베 한필을 스님에게 공양했지만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총각은 저 스님 정도면 공부를 배울 수 있겠다 싶어 무작정 따라갔지. 그렇게 처소에 도착하자 무조건 일만 시키는 거야. 일을 하다하다 총각이 스님에게 언제 공부를 가르쳐 주냐고 물으니 스님이 솥을 걸어보라고 하는 거야. 솥을 걸고 스님에게 여쭈니 잘못 걸었다며 다시 하라고 해 시키는 대로 했지. 그런데 또 잘못 걸었다고 꾸중을 하는 거야. 그렇게 아홉 번을 하자 스님이 ‘이제는 됐다’고 말씀했지. 그 총각이 나중에 구정(九鼎) 스님이 됐지.”

대일 스님은 무엇보다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진실한 연후에 모든 것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할 줄도 모르고 견성도 못했어. 그저 하는 척 할 뿐이지. 그래서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법문할 수도 없어. 자기가 깨닫기 전에는 법문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포교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다만 공부는 진실하게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자기 것이 되는 법이지.”

스님은 또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와 남을 구분하다 보니 남보다 많이 가지려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한다는 것이다.

“〈원각경〉에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이라는 구절이 나오지. 이를 두고 무변허공이 깨달음에서 나왔다는 의견과 무변허공에서 깨달음이 나왔다는 의견이 있어. 하지만 이를 둘로 나눌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해야 돼. 즉 깨달음 없이 무변허공과 같은 청정한 경계를 얻을 수 없지만 청정함 없이 깨달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야.”

이와 더불어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힘이 아닌 덕(德)이나 선(善)으로 교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사람이 선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의 종지부를 ‘이뭣고’로 찍었다.

“자네들은 서울에서 왔지만 온 것이 있나. 고깃덩어리만 여기에 왔지. 몸은 여기에 있어도 생각은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면 여기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려면 ‘이뭣고’를 해봐. 그러다 보면 확철대오는 아니더라도 삶을 덜 고달프게 살 수는 있지.”

스님은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늘 ‘이뭣고’를 하라고 당부했다. 굳이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늘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면 그곳이 바로 법당이라는 것이다.

“육조 스님의 가르침처럼 밝다 하나 어떤 빛이 있어서 밝은 것이 아니라 본연의 지혜 그것이 밝은 것이야. 본연의 지혜는 모양과 색을 여의었지만 어떠한 모양과 색도 분별이 가능해. 또 능히 어떠한 모양과 색도 분별하지만 모양과 색을 여읜 것이지.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더라도, 주위 환경이 안 좋더라도, 도망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싸워야 해. 그것도 어려우면 매일 108참회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을 세우는 것이야. 원을 세운 다음 좋은 스승 만나서 열심히 수행하면 다음 생이라도 깨달을 수 있어. 길이 있어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서 길이 생기는 것이야. 불자들은 이것을 알아야 돼.”

대일 스님은 1931년 경주 건천읍에서 출생해 47년 사미계, 50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전국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71년부터 마천 영원사 한 곳에만 주석하고 있다. 은사는 인곡 스님으로 前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과 사형사제지간이다.

대일 스님을 처음 뵌 순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엄한 할아버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얼굴에 차츰 옅은 웃음이 묻어나자 어떻게 하면 저런 천진난만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맑아 보였다.

스님에게 슬쩍 여쭤봤다. 사형인 혜암 스님과, 같이 수행한 적이 있는 법전 스님은 두분다 종정의 위치까지 올랐는데 부러운 적은 없었는지. 스님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이다.

대일 스님은 대강백이나 뛰어난 선사는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 지독한 원칙주의자 같아 보였다. 특히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평생토록 깊은 산속에서 수행의 한길로 매진하게 한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름에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는 요즘,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가 더 마음 깊이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5-01-24 오후 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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