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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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원로대담]이원섭 시인
40여년 동안 선시를 탐구해 온 이원섭 시인. 사진=고영배 기자
40여년간 본업인 시 창작 보다는 불교 경전과 선(禪)의 세계에서 문자를 넘어서는 진리의 세계를 참구하고,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매진해 온 이원섭(81) 시인. 제법 서늘한 겨울비가 내리던 2005년 1월 18일, 직접 본사를 찾은 이원섭 시인에게 삶을 사는 지혜를 들었다.


대담=위영란 편집부국장


이렇게 저희 신문사로 직접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큼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가물고 눈이 없어요. 눈 없는 겨울은 꽃 없는 봄과 같은데…. 건강은 겉으로 보기엔 좋아보기지만 속으로는 바람이 빠져나갔죠.(웃음) 노쇠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특별한 건강관리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 비결 같은 건 없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지는 거죠. 장수한 사람들에게 장수비결을 물으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둔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정답은 아니죠. 꼭 장수비결이랄 수도 없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십니까?

-불경과 선에 관한 책을 읽고 지냅니다. 방 안에 혼자 있어도 늘 무언가를 생각하며 지내다보니 시간 흐르는 것이나 무료함은 못 느껴요.


수행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나름대로 그저 흥미 있고 마음 끌리는 것에 관심 가지고 사는 거죠. 더구나 수행이란 게 하려고 한다고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본사 위영란 편집부국장(사진 왼쪽)과 대담 중인 이원섭 시인. 사진=고영배 기자
최근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최근에 와서는 선(禪)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가 결국은 ‘깨침’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고, 마음의 본바탕을 어떻게 깨닫느냐, 어떻게 거기로 돌아가느냐의 문제니까요. <전등록>이나 <벽암록> 같은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소설이나 철학책은 관심이 없고 읽어도 금방 지쳐요. 하지만 선의 화두를 생각하다보면 알쏭달쏭 하지만 그 어떤 끌리는 것이 있어요.


불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집안이 불교 집안은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불교와 만나게 된 것 같아요. 원래 종교에는 관심이 많이 있었어요. 교회엔 안나갔지만 성경도 읽어봤고 불경도 좀 읽었어요. 이광수의 소설이 불교적 색채가 강해서 그 영향도 많이 받았지요.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땐 일제의 학교교육이 너무 군국주의적이라 성미에 맞지 않아 혜화전문을 택했어요. 당시 혜화전문에는 조지훈, 김달진, 서정주, 신석정 등 쟁쟁한 문인들이 많아 한국문학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도 끌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화두를 연구해오셨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탐닉’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는데요. 선생님께서 들고 계신 화두가 있습니까.

-특별히 마음에 두고 있는 화두는 없어요. 화두는 표현이 다를 뿐이지 결국 하나입니다. 어떻게 무명과 분별을 깨느냐는 거죠. 표현은 달라도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선불교의 진수격인 화두를 푼 <깨침의 미학>과 같은 책을 내는 등 공안풀이를 많이 하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화두가 있으신가요?

-화두는 원래 풀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수학문제는 지적 분별력으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공안은 분별을 넘어선 세계입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쓰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언어를 초월한 세계이지요. <조주록>에 나오는 것만 봐도 그래요. 조사선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15개나 됩니다. 그때마다 답이 달랐어요. 대답이란 것은 묻는 사람이 분별을 어떻게 깨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가는 것이죠. 정답이나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만 있을 뿐이지. 분별로 접근할 수 없어요.
내 손가락이라 해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입니다. 그렇다면 내 손가락을 바로 본적이 있을까요? 우리가 믿는 감각, 지각으로 인식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냐는 거죠. 이것이 분별의 세계입니다. 학문을 하는 것도 그 사람이 본 하나의 편견, 분별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은 왜곡되고 편협 되어 있습니다. 보편타당성은 논리로 무장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닙니다. 이걸 뛰어넘어야합니다.


오늘을 사는 치유책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 그렇죠. 요즘 과학으로 우주의 기원을 찾는다고 하는데, 이건 답이 없는 거예요. 과거로만 추구해 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아요. 끝없는 소급은 끝이 없는 거니까. 관심 돌려서 지금, 우리의 생활이 어떤 모양으로 이뤄져 있는 것인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이 상태를 살피면서 생사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길을 찾으신 겁니다.
또한 요즘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편으로는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여기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자손이 집을 지켜가는 것 좋은데, 이걸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지키는 것은 아니죠. 끊임없이 손질하고 현 시대에 맞게 고치기도 해야 하는 겁니다. 개혁도 과거를 모두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개혁과 보수는 처음부터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지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오른팔이 있으면 왼팔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서로 어디를 강조하는가 하는 ‘정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니 과격해질 수밖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문제 치유의 처방이 있고, 우리 불자들이 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각자가 자기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세상을 개혁한다는 것은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스스로 고칠 수 있지 않습니까. 정치, 경제학 등도 다시 세워져야 하고 불교의 가르침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 모델을 간디에게서 찾습니다. 간디가 펼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정치사상이죠. 간디는 자신을 억압한 영국마저 사랑하며 무저항주의를 펼쳤습니다. 오늘날에는 간디의 사상과 실천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생님이 40여년 동안 몰입하셨던 문학으로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시인으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과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등 문단의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이 죽었다’는 성급한 얘기도 공공연하게 들립니다.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지적도 많은데요.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기계가 지배하고 주도하는 시대일수록 그에 대한 반발로 시나 음악에 대한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시나 소설이 사회의 겉모습만 다룰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것을 파헤쳐야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그렇다면 선시(禪詩)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요?

-사실 ‘선(禪)’이라는 것은 교(敎)까지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걸 글로 쓴다는 것은 자기모순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시가 언어이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듯, 선도 실제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요. 그래서 자기의 경지를 시의 형식으로 노래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시와는 다르죠. 재주만 있어서는 선시를 쓸 수도, 접근할 수도 없어요. 어느 경지를 느끼고 나서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선시라고 생각합니다. 선에서 얻은 깨달음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선시가 아닙니다.


선시의 개념을 정립해 보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 이제 뭐 힘이 빠져서.(웃음) 하지만 ‘선시가 도대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고 싶기는 해요.


불교계에서는 ‘불립문자’니 ‘교외별전’이니 해서 책을 읽는 것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식의 이해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불자들이 책을 잘 읽지 않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불립문자’ 아닌 불경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이 ‘문자에 매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부처님은 분별을 넘어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불자들은 책을 읽고 책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책을 읽지 않고 믿는다면 도대체 그 믿음은 뭡니까? 뭘 믿는다는 겁니까? 불자들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숙명여고, 마산고 등 일선에서 교편을 잡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지난 한해는 수능부정이나 밀양 고교생 성폭력 사건 등으로 교육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특히 높았습니다.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감히 우리 교육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생님의 권위를 세워 줘야 합니다. 선생의 질이 어떠니, 학원 선생이 더 잘났다느니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요. 학부모가 선생을 고발하고 무시하는 그런 몰상식한 행동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아요. 정규 수업만 제대로 받아도 훌륭한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건 교육 계엄령을 내려서라도 바로 잡아야 해요.


우리는 부처님께 지식보다는 지혜가 더욱 삶을 살찌운다고 배웠습니다. 지혜를 가르치려면 어떠한 자세와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나라 교육도 ‘홍익인간’이니 해서 인격도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학교가 입시학원이 된지 오래입니다. 지식만 주입하는 교육으로 지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지혜는 자기에게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인격도야를 위해서는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과목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같은 책을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하는 기록입니다. 이론보다는 체험에서 우러난,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 있는 책이죠. 예전 한문교육이 여러 병폐도 있었지만 성현들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인격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그런 교육이 없어요.


지식정보화 사회로 치달으면서 속도와의 경쟁이 생존의 무기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다보니 반대급부로 ‘느림의 미학’이니 ‘여유’ ‘귀농’과 같은 것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부상하기도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남이 뛰니 나도 뛴다는 의식이 문제죠. 가만히 있을 수도 있는데 남이 뛰는 걸 보고 자신도 뛰니까요. 이럴 때 일수록 인간의 본질이 뭐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뛰는 이유가 뭡니까. 결국 돈이죠. 하지만 돈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선행부도 말후태과(先行不到 末後太過)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표를 설정해 놓은 것이 허상이라면, 먼저 달려 가봐야 허상이니 닿지를 못하고 꼴찌로 가다보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크게 지나치기 쉽다는 뜻입니다. 달려가는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쓸데없는 문제로 싸우다보면 핵무기 등으로 결국 인류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 외부에 있는 줄 알지만 결국 행복은 자기 마음에 있지 않습니까. 그걸 찾아야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계획이랄 것도 없어요. 지금 천태 대사의 저서를 번역하고 있는데 그걸 마무리 짓는 정도죠.


긴 시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원섭 시인은?
192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경신고, 마산고,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48년 <예술조선> 제2호에 ‘기산부(箕山賻)’가, <문예> 제2호에 시 3편이 서정주 시인에게 추천돼 등단했다. 전국불교신도회 부회장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첫 시집 시집 <향미사(1953)>를 펴낸 이후 <선시> <당시> <논어>를 비롯해 만해 스님의 <불교대전> 등을 번역하며 불교 경전 공부와 번역에 매진했다. 2001년 첫 시집을 펴낸지 40여년 만에 시집 <내가 뱉은 가래침>(2001)을 펴내 선기(禪氣) 넘치는 언어의 세계를 펼쳐보였다.
정리=여수령 기자 |
2005-01-20 오후 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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