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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승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서 사자국(獅子國)으로 명명됐던 부처님의 나라 스리랑카.
1월 12일, 콜롬보에서 남부에 위치한 탕갈라로 향하는 해안도로 주변은 전쟁터와 다름 없었다. 지진해일이 발생한지 20여일이 지나면서 복구가 어느 정도 진척됐다고 하지만 3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혹함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마을에는 집터만 덩그러니 남은채 건물 잔해와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는가 하면, 집채보다 큰 배가 갈 곳을 잃은채 육지에 기우뚱 남아있었다. 1월 12일 밤 11시 탕갈라(Tangalle) 인근 학교에 마련된 캠프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남루한 차림에 희망을 잃은 눈빛을 지녔다. 그들은 날이 밝으면 삶의 전부였던 마을로 돌아가 무너진 벽돌을 나를 것이었다. 5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스리랑카 남동부 함반토타(Hambantota)에서 만난 한 노인, 그에게서도 절망이 배어났다. 형체만 남아있는 집 앞에서 지진해일로 잃은 가족들의 사진을 손에 쥔 채였다.
탕갈라 해안에 살던 가루아츠나(36)는 이번 지진해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집도, 가족도 해일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지진해일이 쓸고 간 것은 삶의 터전과 가족만이 아니었다. 삶의 의지도 앗아가 버렸다.
지진해일 피해 소식이 전해지자 조계종은 종단 사상 처음으로 해외 구호활동에 나섰다. 총무원과 사회복지재단, 동국대 참사람봉사단 등 35명으로 구성된 의료구호봉사단을 꾸리고 스리랑카의 오지 탕갈라와 함반토타의 지진해일 피해 주민을 찾았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피해민들에게 16일부터 22일까지 의료봉사를 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상은 지진해일로 남편과 아내, 아이를 잃은 스리랑카인들의 마음을 치료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필요했다.
조계종 의료구호단은 진료팀과 지원팀, 대외협력팀 등 3개팀으로 짜여졌다. 진료팀에 동국대 의료원팀과 조계종 자원봉사자 등 20명이 배치됐고, 나머지는 지원팀과 대외협력팀에 적절히 배치됐다. 진료는 내과, 외과, 소아과, 피부과로 나누어 한·양방 협진 형태로 이뤄졌다.
16일 아침, 탕갈라 공립학교에 천막으로 따가운 햇빛을 가린 임시진료소가 차려졌다. 한국에서 공수해간 구호물품도 교실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았다. 조계종 의료구호단 공동단장 지원 스님(사회부장)과 진원 스님(호법부장)은 개소식에서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값진 땀을 흘리자”고 당부했다.
지진해일 피해를 입은지 한달여가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의 상처가 남아있는 이들도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맨발로 진료소를 찾아온 자야쿠루(27)는 정강이뼈가 다 보일 만큼 곪은 상처를 내밀었다. 치료를 맡은 최정화 간호사는 비오듯 쏟아지는 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스레 상처를 어루만졌다. 현지인들의 지저분한(?) 행색은 문화의 차이일 뿐이었다.
조계종의 이번 구호활동은 시기가 너무 늦은게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 다른 나라의 의료봉사팀은 이미 활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우려는 첫날부터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탕갈라와 함반토타에 진료소를 설치한 일주일동안 치료를 원하는 주민들이 잠시도 쉴틈을 주지 않고 밀려들었다. 의료진은 정해진 시간을 넘어서까지 진료해야할 지경이었다. 점심시간도 따로 내지못해 2개조로 나누어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탕갈라와 함반토타에서 조계종 의료구호단 이야기는 화제가 됐다. 소식은 입에서 입을 타고 빠르게 전해졌다. 그들이 조계종 의료구호단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말 뿐이었다. 이야기로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속에는 아직 때묻지 않은 순박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진료소에서 만난 이재민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들은 구호의 손길에서 어쩌면 희망을 떠올렸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부단장으로 참가한 조계종 사회국장 인오 스님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한국불교와 한국인을 각인시켰고, 동시에 긴급재난에 대비한 종단기구의 필요성을 과제로 안겨주었다”고 말한다. 조계종은 짧은 시간동안 준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얻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