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외지고 외지고 후미지고 후미진 그곳, 거기 청량산이 있다.
청량산의 외청량(外淸凉), 응진전(應眞殿)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스러져 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노을은, 붉은 노을은 외청량산 암벽에 부딪쳐 그 황홀한 무늬를 수놓곤 했다.
노을 비친 저녁녘, 암벽을 무연히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느 고요한 여름날 저녁 무렵에,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초가을 저녁에, 잔설(殘雪)이 남아있는 봄날의 저녁에, 아니 펑펑 쏟아져 내려 온통 시야가 아득한 한겨울 저녁에, 그는 장승처럼 그렇게 묵묵히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면 한여름 내내 쏟아져 내리는 긴긴 여름날의 장마철이면, 만산홍엽 낙엽지는 가을철이면, 폭설이 내린 한겨울이면 그는 무엇을 했을까?
무엇을 하며 있었을 것인가?
그는 일어나 부지런히 청소를 했다. 법당을 쓸고 닦고 요사의 방들을 쓸고 닦고,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견뎠다. 그리하여 만사를 잊었다.
응진전, 법당에 모셔져 있는 십육 나한님을 향하여 무릎꿇고 경배하며 만사를 잊고자 했다. 잊어버림으로 해서 그의 조그만 정적(靜寂)을 누리고자 했다.
그것이 그때의 서명(西明) 스님 삶의 한 방식이었다.
모른다, 그냥 나대로의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명 스님은 삼사년을 그렇게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좀처럼 아랫절 청량사로 내려오지 않았다. 김치 떨어지고 간장 된장 떨어지면 훌쩍 내려와 점심 공양을 한 뒤 등산용 배낭에 이것저것을 주워담아 울러멘 뒤 간다 온다 말도 없이 가버리곤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외청량으로 올라가 버리곤 했다.
가파른 산비탈 길을 배낭을 메고 올라가는 그의 뒷 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한때 참으로 우울했다. 어쩐지 우울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형언할 수 없는 모종(某種)의 우울함이, 서글픔이 나의 전신을 짓누르곤 했다.
십년쯤 지난 오늘도 외청량산을 올라가는 산비탈을 올려다 볼라치면 그의 흔적이 거기 있는 듯하다. 그의, 휘적거리며 올라가는 먹빛 저고리가 거기 그대로 걸쳐져 있는 듯하다.
서명 스님, 그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그는 지금 충청남도 부여 부근의 오덕사란 조그만 절에
주지를 맡아 머물고 있다. 듣건대 공양주 보살도 없이 혼자 끼니를 해결하며 살고 있다고, 그저 그대로 혼자 지낸다고 전해 들었다.
스님은 사진작가다. 사진 찍는데 취미를 붙여 오랫동안 그 길을 걸어가는 사진작가다. 그는 한때 내게도 사진 찍기를 권유했고, 그런만큼 정말 사진에 미쳐 있었다.
“지현 스님, 지현당, 과감하게 ‘트리밍’해요. 그래야 사진이 사진답게 나와요. 어떻든 간에 사진은 ‘트리밍’이 중요해요…”
그는 이러면서 사진의 이러저러한 내용을 설명했다.
좀처럼 말이 없는 스님이지만, 사진 얘기만 나오면 그야말로 그칠 줄 모르는 ‘떠버리’였다.
‘트리밍’이 무엇인가. ‘트리밍’은 잘라낸다는 뜻이다.
중요하지 않은 사진은 아래나 윗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완벽한 미학을 연출해 낸다는 뜻이다.
‘트리밍’, 삶에 있어서도 트리밍이 될까?
우리네 피곤한 삶의 한가운데, 우리네 긴긴 여로(旅路)에 있어서 과연 트리밍이 유용하게 통할 수 있을까? 과연 자리잡을 수 있을까?
서명 스님, 그는 트리밍과 트리밍을 통하여 저 먼 우주의 블랙홀 쪽으로 빠져나가고자 했을까? 또 다른 태양계의, 또 다른 생명체들과 만나고자 했을까?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고자 지금도 열심히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한때, 고독의 한때를 벗어나 진정한 자기의 중심(中心)을 찾기 위해 애쓰는 그의 면모가 뭉클하게 가슴을 적시는 새벽에, 나는 지금 그를 생각한다.
오랜 탐구를 거듭하여, 그는 ‘국전’ 및 ‘대한민국 사진전’등에 여러번 입선 특선을 거듭하여 추천작가와 초대작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사진을 통한 그의 탐구는 또 다른 선적(禪的) 뉘앙스를 우리네 곁에 다가보고 있다.
말없는 그의 표정이, 저 머나먼 우주의 블랙홀 쪽을 빠져나가기 위한 그의 용솟음이 늘 황홀하길 바란다. 황홀해서 늘 웃음짓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