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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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스님의 스님이야기-설송 스님
노행자 설송 스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십 년 전쯤의 일이다. 토굴을 끼고 있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어느 외진 마을, 거기 산자락에 엎드려 있는 수도암이란 작은 암자에서였다.

도반 몇 명이 함께 꾸려가고 있던 그 곳에 설송 스님이 찾아 들었다. 저녁연기 스미듯 스며들었다.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 아주 번다한 때에 그는 그렇게 와서 잠시 머물다 떠나갔다.
차를 나누며 스님은 그간의 행장에 대해 띄엄띄엄 얘기를 풀어놓았다. 중의 살림살이가 다 그러하지만 그 또한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산하대지를 떠돌아 다녔다.
제방의 선원에서 안거하기도 하고 빈 토굴에서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중의 포교당에서 어린이 법회를 맡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지냈노라고 그는 허허롭게 웃었다.

요즘은 경북 포항 오천이라는 곳에 있는 오어사라는 절 부근 후미진 화전민 마을에 터를 잡고 앉아 있다고 했다. 거기 비어있는 집을 하나 손수 수리해서 감자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채소도 가꾸고 그럭저럭 소일한다고 남의 얘기하듯 했다.
그런 생활이 몸에 익어 별로 불편하지 않다고 떠가는 조각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며 쪽마루에 걸터앉아 해바라기 하는 맛이 재미가 솔솔하다며 웃었다.
한 두 집 남아 있는 화전민들과 어울려 살며 그들과 함께 산기슭의 척박한 농토를 일구며 산 지 벌써 몇 해가 되었노라고, 심심하지도 적막하지도 어렵지도 않노라고 했다.

어떤 때는 훌쩍 떠나 큰절의 뒷방을 얻어 한 철 지내기도 하고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안거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화전민 마을의 움막으로 찾아들어 묵은 밭을 일구며 산다고 했다.

“그대가 여기서 지내고 있다는 얘길 풍문에 듣고 한번 들려 봤네. 참 좋아 보이는군 그래.”

여전히 맑은 목소리, 맑은 눈매의 설송 스님은 여유롭게 조금씩 차를 마셨다.
농부같기도 하고 선승같기도 한 노행자 설송 스님, 그가 내 앞에 앉아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철석철석 파도소리가 들렸다. 해풍이 창호문을 흔들며 지나갔다. 바닷가 살림살이도 괜찮은 것 같군 그래. 중은 그저 제 맛에 살아가는 것이지만....
철석거리는 파도소리에 해풍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쟁반 위에 놓인 귤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여기 수도암에서 한철 같이 지내보자고 그러자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두 해 쯤 떠돌았으니 이제 포항 어디쯤의 자기 움막으로 돌아갈까 한다고, 거기 가서 새롭게 땅을 일구며 사는 데까지 살아볼까 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잘 주무시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실까지 스님을 안내하고 돌아 나오면서 나는 멀리서 깜박거리는 등대를 보았다.
등대... 우리에게 등대는 있는가. 물론 있다, 있고말고.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곧 등대가 아닌가. 그 등대를 의지하여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험한 물결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닌가.

먼 바다에 점점이 어화(漁火)가 떠있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생업을 위해 잠 못 자고 떠 있는 어부들의 삶이 바다 위에서 껌벅이고 있었다. 그들 아내의 아이들의 삶이 어화로 남아 껌벅이고 있었다.
철석철석 파도소리가 들었다. 소금끼 실린 해풍이 뜨락의 나뭇가지들을 몹시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등대.... 그리고 점점이 어화가 떠 있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어촌 마을은 불심이 깊다. 바다를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불심이 깊기 마련이었다. 고기 잡으러 바다로 떠난 남정네들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바닷가 마을 아낙네들은 늘 부처님께 기도드렸다.
부처님께 기도드리기도 하고 남근을 깎아 굴비 두릅처럼 새끼줄에 엮어 걸어 놓은 해신당(海神堂)에 기도드리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 절의 법당과 해신당은 하나였다.

그래서 작은 어촌의 작은 암자의 초파일도 조금은 붐빈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조금은 들썩거린다. 노행자 설송 스님도 절마당의 여기저기를 바쁘게 다니며 연등을 걸고 촛불을 켜고 장난질 치는 아이들을 다둑거리고, 그렇게 꼬박 밤을 밝혔다.

어수선하고 들썩거린 초파일을 지낸 뒷날 아침, 노행자 설송 스님은 내게 작별을 고했다. 그만 떠나가 보겠노라고, 잘 지내시라고 합장하며 미소 띤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그와 작별한 지 이십 년 쯤 지난 오늘 이 새벽에 나는 그가 그립다. 하늘 가득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이 새벽에 그는 깨어나 내가 머물던 곳, 철석이는 파도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저 바닷가 해변 마을의 조그만 암자를 기억하며 앉아 있지나 않으신지.
그 암자의, 조금은 들썩거리는 초파일 밤을 기억하며 노송(老松)처럼 설송(雪松)처럼 앉아 있지나 않으신지...



지현 스님 |
2005-01-17 오후 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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