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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같은 부처의/귀는/바다의 너그러운/미소를 듣고//깨진 코/잘라진 귀/깨진 가슴/돌인데/부처는 웃네’(시집<나비의 꿈>)
대담ㆍ위영란 편집부국장
- 건강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건강비결이 있을까요?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기력이 없어요. 의지가 박약해서 운동을 좀 해야겠다 하고 마음먹지만 그게 잘 안돼요. 가능하면 많이 걷고, 충분한 수면 뭐 그런거죠 뭐. 특별한 비결은 없는 것 같아요.
- 철학자 시인 불문학자 생태철학자로 불립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삶이 가장 교수님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되고 싶은 것은 시인이우. 그냥 감상적인 시인이아니라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싶었어요. 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 문학에 대한 동경이 생겨난 특별한 배경이 있었나요?
어려서는 아주 조그만 시골에서 자랐어요. 초등학교 무렵인가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큰형이 학병을 피해 집으로 돌아 왔는데 당시 문학관련 책들이 많았어요. 그때 문학책이 상당히 있었어요. 어려서 그것들을 뒤지다 ‘웨스트민스트, 노틀담, 파르테논’ 같은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어린 제게는 상상도 못했던 세계를 본겁니다. 그때부터 문학에 대한 동경이 컸어요. 자연스럽게 불문학을 전공했어요. 그때만 해도 구라파 불문학만큼 세련되고 멋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1957년에 서울대 불문학 석사 1호를 받고 이화여대 불문학교수로 부임했는데, 마침 그해 가을 프랑스 대사관에서 국비 장학금을 받아 1년 동안 파리로 갈 기회가 생긴 겁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파리에서의 생활은 정말 큰 충격이었요. 1년 유학을 마치고 다시 이화여대에 복귀했는데 도저히 갑갑해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예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고 61년에 파리로 날아갔어요. 그러다 9년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쳤어요. 91년 포항공대로 되돌아 한국에 정착하기 까지 30년 넘게 외국생활을 한겁니다.
- 젊은 시절 낯선 곳으로의 유학을 결행했고, 30여년 외국에서 대학 강단에 서셨습니다.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얻은 것은 뭔가요?
무엇보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체계가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스울지 모르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철학, 사상 이론적으로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학문적 업적을 내가 한번 성취해야겠다는 분심이 제가 유학을 결심하게 됐던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우리도 지적인 분야에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물론 외국생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60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상당히 주눅이 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외국 생활 초기에도 공부만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당히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내 스스로 사서 한 고생 한 것이지만 무척 외롭기도 했어요. 또 언어적 한계도 컸습니다. 불어를 공부하다 영어로 강단에서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마땅한 배경도 없었던 이방인이었지만, 혼자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냈습니다.
- 요즘 말하는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는 뭘까요?
그 당시에는 외국 나간다하면 무슨 배신자나 배반자 같은 시각으로 보기 까지 했어요(웃음). 세계화라는 것은 잘난 나라를 흉내 내기 하라는 게 아니고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주체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지식정보화 시대에 정신적 가치를 다루는 불교의 역할은?
돈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지 오랩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개선하는데 종교의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불교는 매우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저는 불교가 일종의 철학적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불교의 근본이 4성제 8정도라면 종교의 일반적 요소는 거의 없어요. 물활론(Animism)적인 관점의 다른 종교와는 약간 차별되어 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 적합한 종교라는 생각입니다. 윤회와 연기적 세계관을 명확하다면 지식정보화 시대가 아무리 고도화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염려할게 없다고 봐요.
- 시대의 지성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해답을 부탁드립니다.
조만간 나올 제 자서전 서문에는 제 삶을 지배한 중요한 가치 3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투명성’입니다. 진리를 사실을 객관적이고 사실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열정(Intensity)' 밀도 있는 치열한 삶이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일분일초도 함부로 하지 않고 명료한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가 ’정직성(authentic)' 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진실한가라는 자문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박 교수님은 프랑스 소설가 메르메가 쓴 ‘카르멘(Carmen)’의 정열적인 사랑을 인용해 진실한 삶의 매력을 설명해 주었다.)
- 우리 국민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체성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정체성은 내적 외적 환경과 상황에서 늘 변하는 겁니다. 역사적, 시대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의 잔재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해방 후, 상당히 극성스런 성격으로 변했어요. 좋게 말하면 다이내믹하지만 달리보면 거친면도 있거든요. 일본에게 수탈당하고 한국전쟁, 좌우이념 갈등을 겪으면서 형성된 국민의 정체성을 좀더 세련되게 가다듬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너무 정체성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파르동 파르동(죄송합니다)’이라고 말하는 거나 일본사람들이 ‘쓰미마셍, 쓰미마셍(실례합니다)’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이 꼭 그들의 정체성은 아니거든요(웃음). 중요한 것은 주체성입니다. 자기중심을 명확히 세우고 당당하게 살아가면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고 봅니다. 모 자동차회사에서 나오는 코란도(Korando)라는 자동차의 이름이 ‘Korea can do'의 줄임말이랍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진 저력과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서 제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 현대인들이 쾌락을 쫓는 성향이 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귀족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 가진 분들이 있던데… 하하. 그렇지만 누구나 귀족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죠.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원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지적이고, 정직하고 비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건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건 뭘 해도 잘할 수 있겠죠.
- 한국사회의 갈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메시지가 필요해보입니다.
무엇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있는 사실을 자기 기분대로 색칠해서보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논리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앞서 말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제대로 정립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국민들에게도 희망이 있겠죠.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정치지도자나 국민들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인 측면들을 쉽게 표출한다는 겁니다. 일부사람들처럼 가슴에 ‘한’을 가지고 나도 한번 거꾸로 복수해야겠다는 식으로 문제를 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방식은 남북문제를 비롯해 다른 주변 국가들의 관계형성에 있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교수님은 최근 환경철학을 말해 왔습니다. 개발과 보존의 문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감히 제가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문젭니다. 저는 생태주의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적 인식과 괘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개발 논리나 경제적인 문제로 환경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을 소극적 생존의 문제기 때문에 무조건 비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접점과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결국은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여기도 지금 물건이 너무 많잖아요(웃음). 적게 먹고, 적게 쓰는 불교적 삶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생명복제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제가 96년인가 생명윤리학회의 초대 회장을 했어요. 그때는 무조건 생명복제에 대한 반대 입장이었어요. 요즘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복제를 했다고 하죠. 일부에서는 그걸 생명조작이라고 비난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조작에 익숙해져 있어요. 우리가 한약이나 건강식품을 찾아다니며 먹는데 이것도 넓게 보면 조작이거든요. 지금은 이게 좀더 복잡하고 정밀하고 놀라운 수준의 것이라는데 차이가 있을 뿐이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경솔하게 판단하지 않고 신중한 접근 필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 한국사회 종교갈등의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대처방법은?
다른 어떤 갈등보다도 종교갈등이 가장 무섭습니다. 왜냐면 이 표출방식이 가장 극단적인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념가운데서도 종교적 신념만큼 근원적인 것이 없거든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일 수록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일부 종교는 성격상, 교리상 광신적인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외부 간섭에 의해 제도나 틀을 가지고 통제하려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상대종교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먼저 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 앞으로 계획은 무엇입니까?
2~3년 안에 ‘둥지의 철학’을 정리해서 책을 내볼 생각이에요. 저는 둥지라는 것이 우리가 이상적인 세계를 보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둥지는 원시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철학이나 종교나 과학적 이론, 종교적 세계관 등,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것이 둥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인간과 자연의 조화도 모두 이속에 있습니다. 또 이달 말경 두 번째 제 자서전이 나옵니다. 제목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입니다. 부끄럽게도 내 자신은 엉성하게 살아 왔지만 나름의 회한과 세계관을 담은 거예요. 이미 87년인가에‘사물의 언어’라고 자서전을 하나 쓰긴 했지만, 이번 것은 지난 것 보다 좀더 솔직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끝으로 몇 년 전 <나의 출가 영원한 물음>이라는 책을 낸 것으로 압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불자들에게 희망 화두를 던진다면?
쑥스럽지만 ‘출가’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데 그냥 ‘출가’라는 말을 도용한 것뿐입니다. 건방지고 외람되지만 그 책을 낼 무렵 문득 평범하지 않았던 제 삶이 ‘출가’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냥 한국에 있었다면 대학교수라는 명예와 출세가 보장된 안정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집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결혼도 않고 학문을 위해서만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웠지만 도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박이문 교수는 1930년에 충청남도 아산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강의하다 한국을 떠나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지에서 30여 년 동안 지적 탐구와 대학강단 생활을 했다. 그는 ‘너무 외로워’ 53세의 늦은 나이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 했노라고 말했다. 포항공대 교양철학 교수로 정년 퇴임후 3년 전부터 연세대에서 특별 초빙교수로 교양철학을 가르친다. “앞으로 한 10년은 더 강단에 설수 있을 것 같다”는 박 교수는 요즘도 일산 자택에서 집필과 왕성한 연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불교적 성찰을 시적언어로 표현한 <나비의 꿈><울림의 공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