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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ㆍ붓질 조화이룰 때 진정한 선서화"
석정 스님 선서화 특강 인기… 선서화가 뭐길래?

대형 달마도 퍼포먼스를 펼치는 범주 스님


형상을 여읜 학, 문자를 벗어나 승천하는 듯한 ‘龍'字, 일필에 담은 달마상….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논하는 선승들이 그림으로, 글씨로 그들의 족적을 남겼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 그 어떠한 상(相)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하였거늘, ‘선서화(禪書畵)’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은 이 자유분방한 붓의 흔적은 무엇일까.

지난 해 국립청주박물관 전시에 이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된 ‘고승유묵-경계를 넘는 바람(2월 27일까지)’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선서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상(相)으로써 ‘상을 여읜 상’을 제시한 선승들의 선묵(禪墨)을 과연 어떻게 읽고 또 즐겨야 할 것인가는 전시장을 찾은 대중들의 화두다.

1월 11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석정 스님(선주산방 주석,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의 ‘선서화의 역설에 대한 이해’ 특강을 참조해 선서화란 무엇이며, 또 그 속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 선서화란?

스님의 그림이나 글씨는 모두 선서화가 될 수 있을까.
선서화 대중강좌에 나선 석정 스님
석정 스님은 “선종 전통을 따르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모든 작품들을 선서화라 이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스님은 재가자의 작품일지라도 글씨나 그림에 몰입해 자신도 모르게 선의 경지에서 작업해 내놓은 결과물이라면, 선(禪)의 정신을 담은 선서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석정 스님은 “스님의 ‘수행’과 ‘붓질’이 융합되지 않는다면 선서화의 최고 경지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선서화를 그리는 주체는 수행으로 다져진 선미(禪味)와 선기(禪機)가 살아있어야 하고 예술작품을 형상화할 수 있는 표현상의 규칙까지 체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표현에 있어서도 ‘기법’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원광대 고고미술학과 최순택 교수는 “문인화는 사의화(死義畵)라 해서 그림에 그리는 이의 취향이나 인격을 배제한 그림이지만, 선화는 그러한 개념까지 초월해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받지 않는 사사무애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은 잘 그리려는 생각이나, 잘 그린다는 기준으로부터 벗어나야 선서화인 것이다.

따라서 선서화를 감상하는 사람 역시 대상에서 특정한 실체를 보려고 한다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석정 스님은 “선미와 선기는 그저 느껴질 뿐”이라고 말한다.



▽ 선서화, 무엇을 담고 있나?

그렇다면 선서화에서 중시되는
중광스님 작품 <학>
‘스님들의 수행력’은 선묵(禪墨)에 어떻게 녹아날 수 있을까. 석정 스님은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린 소나무의 예를 들었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를 보고 까치는 진짜 소나무인줄 착각하고 앉으려다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사실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한편, 석정 스님은 “영감이 발달한 까치는 솔거가 표현한 소나무의 정신성에 이끌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서화 역시 그것이 어떤 식의 표현을 담고 있든지 간에 그리고 쓴 이의 수행력과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옛 중국에서 초서(抄書)로서 이름을 날렸던 혜거 스님은 한때 아무리 애를 써도 글씨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견성을 한 이후 초서의 달인, 즉 초성(抄聖)이 됐다. 이때 선서화는 선수행의 방편으로서 깨달음의 도정에서 나온 산물이 된 것이다.

그렇게 수행의 공력이 들어간 선묵은 보는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범주 스님(달마선원장)은 “수행의 깊이가 스민 선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밝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선이란 곧 진심, 즉 불성을 밝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따지자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릴 수 없는 선서화는 그 가치를 말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선서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무기교의 기교’도 선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기교의 고개를 넘고 넘어 ‘무기교’에 이른 선서화는 객관적인 기준을 넘어선 ‘파격’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석정스님 작품 <일원도>
아주대 교양학부 홍성기 교수는 금강경의 ‘응당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낸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로 ‘무기교의 기교’의 개념을 풀어낸다. 즉,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선의 정신이 붓의 획으로 화하여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있는 듯 없는 듯 알 수 없었던 선미와 선기는 일거에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그 상(相)을 의도적으로 지으려 한다면 선미와 선기라 이름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홍 교수는 “이 같은 역설 구조를 떠날 때야 선의 정신이 비로소 환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선서화는 부적이 아니다
최근 ‘영험함’을 내세운 달마도를 사고파는 이들이 늘고 있다. 수행력을 필력으로 소화한 달마도에는 스님들의 좋은 기운이 묻어나기 때문에 달마도는 액운을 막아주고 병을 고쳐주는 ‘좋은 부적’이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퍼진 것이다.

그러나 석정 스님은 “깨달은 이의 선묵에는 맑은 기운이 흐르기 마련이지만, 수준 미달의 ‘단순한 그림’으로 대중을 오도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한다. 달마도의 거장으로 불리는 범주 스님 역시 “수준 이하의 달마도를 부적처럼 팔아대는 것은 달마 스님을 모독하고 불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무기교를 의도적으로 흉내내며 수도 없이 생산되는 졸작들도 문제다. 일부 스님들은 선기로써 거침없이 내지르는 것이 선화라며 작품을 하루에 수백 장 이상씩 ‘찍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홍성기 교수는 “기계적인 반복과 의도적 무기교로 생산된 작품에는 인공조미료와 같은 작위가 남아있다”며 “아무리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자유로운 필치라 하더라도 선기의 상으로 삼는 순간 집착이라는 어리석은 행위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졸렬한 선서화의 경우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을 본뜬 글씨’인 일본의 ‘상서(相書)’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모습을 ‘風’자의 모양 속에서 표현할 수는 있지만, 바람의 근본적 속성을 담아내는 것은 어렵다. 선기를 드러내는 작품보다 선기를 흉내낸 작품이 더 많은 현실에서, 수행력과 필치가 최상의 조화를 이루는 한국의 선서화는 과연 언제쯤 제 빛을 찾을 수 있을까.
강신재 기자 | thatiswhy@buddhapia.com
2005-01-13 오후 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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