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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승려들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현실관 그리고 생명력은 ‘일상성의 종교’로서의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수행자로서의 엄격함과 칼날같은 정진력 뒤켠에서 묻어나오는 인간적 번민과 고뇌 그리고 인정스러움이 때로는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때로는 ‘인간적’이라는 말이 가지는 한계인 속스런 차원에 매몰되지 않고 이것을 공부로 승화시켜 버리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그 절묘한 반전은 지혜 그 자체이다.
비구와 비구, 비구와 비구니 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승려와 거사, 그리고 승려와 청신녀 등 다양한 상황의 설정과 긴장감이 주는 팽팽함은 이제 천년세월을 넘어 또다른 신화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신화는 생명력을 어떻게 불어넣느냐에 따라 현재가 되기도 한다. 삶 따로 불교 따로, ‘당송(唐宋)시대 따로 한국시대 따로’가 되어버린다면 그 책임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신화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또다른 우리의 현실이다. 바로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신화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그래서 이제 그 선종사의 신화같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오늘에 다시 되살려보겠다는 것이 이 연재하는 사람으로서의 변(辯)이라면 변(辯)이다.
선종의 1700공안은 이미 법칙화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는 또다른 박제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생명력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 공안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선 지금도 계속 화두가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이 도출된다.
일상성의 종교인 선종의 진면목
오늘의 우리 이야기로 풀어보자
그 공안은 ‘차나 한잔 마시게’ 대신에 ‘커피나 한 잔 하게’라는 뭐 이런 식의 모방이라면 그것도 곤란하다. 그나마 현재 가장 대중화되어 있는 ‘이뭣고’ 화두는 만들어진지 1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순수토종 창조적 공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700공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 공안이 단절되었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이후의 역사가 없다보니 과거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복제로 가고, 복제는 박제가 되고, 그러다보니 현재와 무관한 남의 나라 먼 이야기가 되어 복고주의라는 불교사의 퇴행적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일상성의 종교’인 선종(禪宗)의 진면목을 한 꺼풀식 벗겨내면서 그 일화가 의미하는 당시의 일상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오늘날의 그것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고전이 가지는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며 계왕개래(繼往開來)가 아니겠는가.
원철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였으며, 해인사승가대학ㆍ실상사화엄학림ㆍ동국대(경주)불교학과 강사를 지냈다.
번역서로는 <역주 선림승보전 上ㆍ下>(장경각)이 있으며, 틈틈이 경전과 선어록 번역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