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1~23일 중국 절강대학에서는 ‘중국 강남과 한국문화교류’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열렸다. 고려사 복원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를 조망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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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를 마친 후에는 주최 측 주선으로 항주시 종교국장과 설계회사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고려사 중건 방안을 들을 수 있었다. 명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사 그림에 의거해 조벽·방생지·천왕전·대웅전·화엄경각·윤장전 등을 산세에 따라 앉히는 방안이 유력해보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고려사’가 원래부터 고려사였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본래 이 사찰은 혜인사(慧因寺), 혜인고려화엄교사 등으로 불렸던 것이고 보면 중건 사찰을 고려사라 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 들어 ‘고구려’, ‘신라’가 지명에 포함되는 경우 ‘해음(諧音)이라 해서 발음은 같되 의미가 달라지도록 한자를 바꿔 쓰는 것이 추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라는 이름을 채택한 데는 김준엽 교수(사회과학원 이사장)의 공이 컸던 것 같다.
혜인사가 처음 고려사로 불렸던 기연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승인 혜인사 주지 정원(淨源) 스님을 만나고 고려로 돌아온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1087년 금서삼역의 <화엄경> 180권을 보내자 정원 스님이 이를 기념하고자 화엄대각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혜인사는 고려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고려사 복원과 관련 항주시는 △원칙을 중시한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중국의 전통문화를 각기 중시한다 △의천국사와 관련된 것을 살린다 △중국승려가 관리한다 △한국 스님과의 교류를 위한 공간을 확보한다 △기념구역을 설치한다 등을 기본방침으로 세웠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의천각(義天閣)도 중건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기대되며, 고려사 중건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고려사 못지않게 우리 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곳은 하모산 천호암이다. 천호암은 태고보우국사가 석옥청공 스님을 처음 만난 곳이다. 태고보우 스님은 ‘태고암가’를 석옥청공 스님에게 바쳐 인가를 받고 임제선을 전수받았다. 석옥 스님이 게송을 설해 인가한 글에는 “금린(金麟)이 곧은 낚시에 올라온다”고 했다. 보우 스님이 이때 의발을 받았기 때문에 임제종의 제19대 조사가 됐다. 원나라 지정6년(1346) 보우 스님이 하모산 천호암을 찾았을 때 석옥청공 스님과 나눈 선어가 <태고보우어록>에 전한다. 태고보우선사가 귀국해 국사로 있을 때 청공선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리를 해동으로 가져올 것을 공민왕에게 주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필자는 태고선사가 임제종 제19대 조사로 인가받은 지 꼭 658년, 석옥선사 열반 652주년이 되는 2005년에 임제종 전수와 사승관계를 기리는 기념비 하나를 천호암에 세울 것을 제안한다. 천호암은 한국 임제종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항주 고려사는 금년 9월까지 제1차 공정이 끝내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한 하모산 천호암은 언제까지 처량한 절터로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