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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과 함께 흩어진 그들-
스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발 일어나라고 사정할 사람도 나타나지 않는다. 스님은 이 작은 공간에 숨어 있다. 도롱뇽을 앞세운 천성산 살리기는 항고심에서도 졌다. 법정은 “상생의 조정안을 냈는데 받아들이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했다. 무엇이 상생이란 말인가.
서로 사는 길? 생명을 지키는 일에도 타협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공사가 지연되면 연간 수조원이 낭비된다고 했다. 수조원이 어떻게 환산되어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공사를 강행한다는 전제하에 나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번 판결도 그 연속선상에 놓여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지율스님을 짐스러워 했다. 앞에서는 원칙주의자라고 했으나 뒤에서는 수군거렸다.
한때 100개가 넘는 단체가 참여했던 ‘천성산 지킴이’들은 판결이 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국을 해체했다. 그만하면 됐단다. 지율에게도 할 만큼 했으니 손을 털자고 했다. 불교계와 시민단체는 정치적인 땅으로 옮겨갔다. 다들 떠나갔다. 천성산 살리기는 이제 지율스님의 개인 문제로 남아있다. 늘 혼자였지만 작금의 홀로됨은 서럽다.
흐린 오후, 스님을 만났다. 그러나 아무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스님 혼자서 얘기를 풀었다.
“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나왔으니 세상이 시끄럽죠? 미안합니다. 절집이 그리워요. 법문을 듣고 구도를 하던 때가 아니라 노스님의 꾸중을 듣고, 바느질하고, 잘난 척 하고, 수다를 떨던… 그때가 정말 그리워요.”
얼마나 고단했으면…. 지난 3년 남짓, 돌아보면 순간 순간이 폭풍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정치권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듣지도 못한 법률용어를 입에 올려야 했고, 자료를 뒤적여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또 권력이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고,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온몸을 던져 천성산을 감싸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세상은 스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힘겨운 나날이었다.
처음 ‘천성산 살리기’는 잘 짜여진 운명 같았다. ‘산이 나를 부르더니, 산이 이제 나를 가르치는구나.’ 스님은 산의 품에 안겼다. 그러다 꿈 속인듯 선방에서 들은 나무들의 비명에 이끌려 산을 구하러 절집을 나왔다. 스님은 그걸 ‘지구적 본능’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식을 시작했다. 이번이 4번째 단식이다. 단식은 자신이 살고싶은 땅을 지키겠다는 간절한 기도였다. 천성산 꼬리칠레도롱뇽은 스님 자신인지도 모른다.
-한갓 구경꾼에 불과한 우리-
조심스레 단식을 그만하시라고 했다. 스님은 물러나 앉아 있을 자리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던졌듯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지킬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스님은 비록 법정에서는 졌지만 지금도 승리하고 있다. 지난 항고심에서는 40만명이 도롱뇽 살리기에 동참했다. 그 맑은 눈망울과 고운 심성에 지율스님은 살아있다. 그 ‘초록의 공명(共鳴)’ 중심에 스님이 앞으로도 계속 서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본질을 잊고 있다.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똑바로 보지 않고, 거대한 권력과 지율의 싸움에 한갓 구경꾼이 되어 있다. 지금 파괴되고 있는 것은 지율 뒤의 자연이다. 자연은 보지 않고 지율만 보고 있는 것, 그것은 모두의 죄악이다.
〈김택근/ 경향신문 출판본부장 wtkim@kyunghyang.com〉